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 효자(孝子)와 풍정(豊井)숲   풍정리의 동네 입구 대로변에 옛날에는 동수(洞藪)라 일컫는 대림(大林)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풍정숲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월 따라 대림을 가르는 큰 길(국도33호선)이 뚫리고 주위에 집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지금은 경사진 언덕배기에 자그마한 숲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 숲에 대한 고사(故事)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전, 풍정마을에 최씨성(朔寧崔氏)을 가진 일가(一家)가 살았는데. 그 중에 최진령(崔振寧)이란 분에게는 아들 두남(斗南) 소년이 있었다.   소년 두남은 어려서부터 효도(孝道)가 지극하여 최씨가문(家門)의 효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났다. 그러다 동년(童年) 12세 때에 임진란을 만났는데,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도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동구(洞口)밖 대림에 피란한 것이다.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그는 여타 아이들보다 숙성(夙成)하여 용의(容儀)가 특출하고 영특하여 피란중에도 채습감지(採拾甘旨) 하여 아버지를 정성껏 모셨다. 하지만 칼머리에서 밥을 짓고 숲속에서의 피란생활이 그에게는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때로는 밖으로 나갔다가 수차에 걸쳐 우도(遇盜)하기도 했는데, 그럴때 마다 노부모를 칭탁(稱託)하고 애원하면 그 중에는 늙은 노도(老盜)가 있어, 그 효성에 감동되어 화(禍)를 모면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두남은 먹을 양식을 구할려고 바깥에 나갔다가 때마침 왜적(倭賊)들의 습격을 받아 마침내 사로잡히고 말았다.   ‘아! 이일을 어찌할고나...’   당시 사천지역에는 왜장(倭將) 시마쯔(島津義弘, 명나라 군사는 그를 石漫子라 했다)란 자가 거느리는 수천명의 왜군이 신채(新寨:현 선진리성)를 배수진(背水陣)으로 삼고 사천성(泗川城)등에 포진하여 인근 고을을 넘나들면서 온갖 약탈과 분탕(焚湯)을 저지르고 있었다.   경황망조(驚惶罔措)한 두남은 앞이 캄캄하여 이제는 죽었고나 하고 생각하니 무엇보다 늙으신 아버지가 걱정되어 한시라도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몸부림치고 체읍(涕泣)하며 애소(哀訴)해 보았지만, 사나운 적은 놓아주기는 커녕 저만치 끌고 가다가 되려 귀찮다는 듯이 가해(加害)코저 하였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무리의 한 두목(渠酋)이 부하들의 그와 같은 행위를 말리고서 두남 소년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 보는 것이었다.   “이 아이의 용모가 뛰어나게 잘 생겼구나(顔貌殊絶)!장치 필다자손(必多子孫)할 상(相)이니 사로잡아 일본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그의 부하들은 두남 소년을 그들의 본지인 신채로 끌고가 쇠밧줄로 묶어서 날마다 지키는 것이었다.   꼼짝없이 사로잡힌 두남은 아무리 애읍(哀泣)하고 빌어 보았자 소용없음을 깨닫고 이제 어찌하면 도망칠 수가 있을까 하는 궁리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성안 이곳 저곳에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사뭇 경계가 느슨해졌다. 게다가 너나 없이 거나하게 술에 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모두 잠이 드는 것이었다. 이 때 주위를 살핀 두남은 틈을 놓칠세라 재빨리 왜추(倭酋)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베고는 성채를 빠져 나왔다.   정신없이 어딘줄도 모르고 수리(數理)를 달리는데, 이번에는 5~6명이 추급(追及)해 오므로 두남은 위급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번신향적(飜身向賊)하여 앞서 오는 자를 먼저 격살(擊殺)하니 여타 무리는 모두 도산(逃散)하였다.   이렇게 무사 귀환하여 아버지를 뵈오니, 아버지 진령공은 아들 잃은 슬픔에 젖어 식음을 전폐하다 싶이 하여 거의 사경(死境)을 헤매이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온 아들을 보자 기쁨에 겨워 한없이 눈물만 흘리는 것이었다. 이 때 두남의 나이 15세였다.   그 후 두남(斗南)의 용감한 탈신사(脫身事)와 출천지효(出天之孝)는 마침내 조정에까지 상문(上聞)한 바 되어 복호(復戶:나라에서 구실로 시키는 일, 곧 徭役을 면제해 주는 일)의 은전(恩典)을 입었을 뿐 아니라 장악원정(掌樂院正)이란 직계의 벼슬이 내렸다. 따라서 수직(壽職)을 배(拜)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하고 육남(六男)을 두었으니, 손증(孫曾) 이하는 누백인(累百人)이더라.   덧붙여 첨추공(僉樞公)의 부인 진주정씨(晋州鄭氏)는 효성으로 시어른을 섬기고 예절과 공경으로 가장(家長)을 받드니 원근(遠近) 사람들이 다 현부인(賢夫人)이라고 일컬어서 경애(敬愛)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부인은 최씨가문에 시집와서 수청리의 이구산(尼丘山) 성지곡(聖智谷)에 제단을 쌓은 후 그 밑에 찬물 나는 샘물을 떠 놓고 신령님께 치성을 드렸는데, 그 영험(靈驗)한 은총으로 아들 육형제를 낳아 모두 실패없이 훌륭히 키워냈다.   아들은 원립(元立)∙형립(亨立)∙정립(貞立)∙극립(克立)∙준립(峻立) 그리고 덕립(德立)의 6형제로서 훗날 삭령최씨 사정공파(司正公派)의 중계(中系) 8파중 6파조(派祖)가 되었다.   현재 수청마을 성지골에 이르면 가파른 비탈에 국관사(國官寺)가 들어 서 있고, 그 절 언저리에는 옛날 정씨부인이 성심기도로 치성드렸다는 제단의 흔적이 역역하고. 그 밑 샘에서 솟아나는 석간수(石澗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흘러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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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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