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 몽룡(夢龍)과 보검(寶劍)   정동면에서 동족으로 1.5km쯤 청법산의 벼랑 밑 노루목을 지나면 몽대(夢垈)마을이 나타난다. 몽대란 용꿈을 꾼 집터에서 아기장수가 태어났다는 일화에서 오래된 지명이다. 지금은 장산리 대산(垈山)이라 부르는 이 마을 뒤에는 태고의 영겁속에 천금산(千金山)이 솟아 두르고, 앞 들에는 장류수(長流水)의 장천(獐川)이 굽이쳐 흘러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 농촌마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지금으로부터 430여년전 이 한적하고 양지바른 마을에 신안주씨(新安朱氏) 일가(一家)가 먼저 입주한 밀양박씨(密陽朴氏)등의 성씨들과 어울려 촌락을 형성해 나갔다. 주씨성을 가진 젊은 사람은 이름을 읍(浥:증 호조참판)이라 했는데 아내와 함께 연로하신 양친을 모시고 살았다.   먼저 입주한 박씨 집안은 원래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나 으슥하고 궁벽한 이외진 곳에서 서로 이웃이 생기자 옛벗처럼 곧 친숙해졌다. 따라서 우거진 덤불을 헤치고 농토를 일구는 일에도 힘을 합했고 농사일도 서로 도와가면 일했다.   그렇게 지내오는 사이 젊은 주읍(朱浥)의 아내는 만삭이 다되어 오늘내일 하며 해산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맑게 갠 가을밤 주읍은 꿈을 꾸었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도 맑던 하늘이 갑자기 검은 먹구름이 몰려 들더니 온 하늘은 비바람과 함께 하늘의 위력(威力)이 삽시간에 뒤덥이고 사방은 암흑천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비바람속에서 번개가 번쩍이면서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와 함께 푸른빛 영롱한 청룡(靑龍)이 동방에서 비등(飛騰)하여 방안으로 들어 오는데, 집안은 온통 오색구름에 휩싸이는 것이었다.   너무도 놀랍고 희한한 일이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그는 정신이 아득한데 꿈에서 상서롭게 보이던 구름(瑞雲)은 온데간데 없고 밖에서는 세찬 바람소리만 요란하게 들려 왔다.   ‘원, 세상에 이런 희한한 꿈이....’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장래에 무슨 불길한 징조라도 하고 생각하였지만 이는 분명 용꿈(龍夢)이 아닌가. 용꿈을 구면 좋은 일이 있을 조짐이라 함을 모르는 바 없는 그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던 차 안채에서 오랜 산고(産苦) 끝에 아내는 마침내 몸을 풀었다. 귀여운 옥동자였다. 얼마나 바라던 아들이었던가. 때는 계해년(癸亥年:1563년) 9월 스물닷새날 자시(子時)였다.   날이 밝아 갓난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은 이웃집 사람들은 주씨집안의 생남을 모두 기뻐하고 축복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주씨는 꿈에 나타난 현상이 태몽(胎夢)의 좋은 징조라 여기고 아기의 이름을 몽룡(夢龍)이라 지었다.   그런데 이게 또 웬 일인가?   아기가 태어나자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의 장류수(長流水)가 별안간 흐름을 멈추고 마르더니, 3일이 지나자 다시 원래대로 흐르는 것이었다. 이같은 이변을 괴이(怪異)쩍게 여긴 주민들은 이인(異人: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 아기가 태어난 변고의 탓이라 여기고 길흉(吉凶)에 대한 의견이 서로 엇갈려 야단법석이었다.   옛날에는 반란이나 역모가 자주 일어난 탓에 그 영향으로 이인이 태어 나면 외적을 무찌르고 태평성대를 이룰 장재(將材)감이라 하여 키울 생각을 하지 않고 태어나는 족족 죽여 없앴다. 때문에 이런 이인이 난 고장을 반역향(反逆鄕)이라 낙인찍어 푸대접 했고. 이런 인물이 태어났는데도 조정에 고하지 않는 지방 관장(官長)이 있으면 벼슬은 고사하고 목숨까지 내어 놓아야만 했다. 이처럼 고루(固陋)한 인습(因習)에 젖어 있는 시대라 주민들은 혹시라도 하고 아이는 물론 주씨네 집안을 한결같이 염려하고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그러한 걱정에도 아랑곳 없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세월은 흘러서 몽룡 소년은 어릴적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몸가짐이 신중하여 여타 아이들과는 달라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성장하였다. 그는 9살 때 부터 충효(忠孝)에 대한 관심과 뜻을 두었고 문장을 잘했다.   어엿하게 성장한 그는 이미 넘치는 원기가 왕성하여 열다섯이 되자 옛날 왕자가 노닐었다는 어정상(御停山)을 비롯하여 주위 아름다운 산수(山水) 속에서 헌헌장부(軒軒丈夫)다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또 활소기의 무예(武藝)를 익히는 등 그 용력(勇力)이 탁월했고, 특히 무릎 굻고 앉은 자세로 10자쯤 되는 거리를 예사롭게 뛰어 넘으니 보는 사람마다 혀를 내어 두르며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봄, 뒷산 용바위(龍巖)에 한 마리의 이무기(螭龍)가 나타나 또아리를 틀고 때아닌 비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몽룡 소년은 이내 활과 살을 움켜쥐고 천금산에 올랐는데, 과연 듣던 소문대로 비늘이 영롱한 이무기 같은 물체가 바위에 누워 있는데 사람의 눈살을 찌르는 듯했다.   몽룡은 멀찌막이 서서 자세를 가다듬어 분연히 활을 당기니, 살은 명중하여 둔탁한 쇳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이무기의 형상을 한 물체는 이무기가 아니라 은빛 찬란한 한자루의 대검(大劍)이 영롱한 은회색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몽룡은 ‘내가 그동안 무예를 닦고 호연지기를 기르며 치성을 드렸더니 영험(靈驗)하신 신령님께서 내리신 보물이 아닐까?’하고 그는 두려운 듯 망설이다가 곧 칼을 거두워 산에서 내려 왔다.   그 후 몽룡은 나이 스물한살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자리에 올랐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용바위에서 얻은 대검으로 왜적을 무찔러 크게 전공을 세웠다.

• 후 기(後記)   주몽룡(朱夢龍)장군의 행적을 살펴 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공의 자는 운중(雲仲)이며 호는 용암(龍巖)이다. 선조 16년(1583)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이 되고.1592년(선조 25)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金山.현 경북도 금릉군)군수로 부임하였다. 부임했을 때는 이미 고을 전역이 거의 왜적에게 짓밟힌 상태였으므로 백성들의 고초를 크게 탄식하고 바로 의병을 모아 실지회복에 무위(武威)를 떨쳤다. 그러나 그는 한 고을을 지킨다고해서 전세가 회복될리 없음을 깨닫고.의병을 다시 모아 왜적을 크게 무찌르기로 다짐하고는 금산 군수를 사임코자 하는 내용의 소청(疏請)을 올렸다.   곧 ‘소신의 마음은 마치 준마(駿馬)가 마구간에 엎드렸으되 마음은 천리를 달리고 싶고, 매가 비록 시렁위에 앉았으되 뜻은 창공을 날고 싶은것과 같으오니 본 군은 적당한 인재를 골라 맡기시고 소신은 왜적 섬멸의 기회를 주시옵기 간절히 바라나이다’고 하였다.

  그런 다음 공은 의병을 이끌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강덕룡(姜德龍), 정기룡 (鄭起龍)장군과 더불어 거창 우지현(牛旨峴)싸움에 용전, 왜군을 격파하여 크게 공을 세우고 이른바 영남(嶺南)의 3용(龍)이라 일컬었다. 이어 의령에서 창의(倡義)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들어가 창령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렀을 뿐 아니라, 거제섬에 주둔한 적을 협공할 때 참전, 용맹을 떨쳤다.

<충익각에 걸려 있는 18장 제위>

  공은 이 밖에도 조령(鳥嶺)전투를 비롯하여 영남 우도 여러 곳의 전투에서 연전연승 용맹을 떨치니 당시 사람들은. ‘지(智)는 신과 같고.용(勇)은 맹호(猛虎)와 같아서 지용을 겸비한 명장이다’라고 칭송의 소리가 자자 하였다.   1612년(광해군 4)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가증(加贈)되고. 1633년(인조 11) 12월 18일에 졸했다. 태인(泰仁)의 충렬사(忠烈祠)와 의령의 충익사(忠翼祠)에 각각 제향되고. 시호는 무열공(武烈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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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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