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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상사(相思)바우의 전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수청마을. 뒤에는 우리의 명산 이구산(尼丘山)이 우뚝 솟아 두르고, 앞쪽에는 감인모발(鑑人毛髮)의 물빛 고운 사천강이 휘돌아 흐르고 있다.   또 동쪽마을 노천(魯川)에서 이구산의 산등성이를 올라가노라면, 지금도 찬물이 솟는 샘이 있고, 그 바로 위에는 날이 몹시 가물어 비가 오지 않으면 옛날부터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두평 남짓의 바위가 있다. 딱히 언제부터라 말할 수는 없지만 기우제의 제단 구실을 해 온 이 바위덩이를 이름하여 상사바우라 했다.   옛날 이 아름답고 산수 좋은 수청마을에 서재서당(書齋書堂)이 있었는데, 그 곁에는 가난하게 살아가는 늙은 무당(巫堂)과 외동딸이 있었다.   딸아이의 이름을 귀순(貴順)이라 불렀는데, 비록 무당의 딸로 태어나 행색은 초라하고 남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천성이 어질고 효순(孝順)한데다 용모 또한 단아(端雅)하고 아름다워 어딘지 모르게 귀태(貴態)가 나는듯 했다.   따라서 어느 덧 열여덟의 아리따운 처녀로 성장한 귀순이는, 동네 여느 아이들 보다 숙성(夙成)하여 벌써 혼담(婚談)이 오갈 정도로 이성(異性)에 대한 기대에 가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세속적으로 무가(巫家)의 딸이라면 천인시(賤人視)하고 하대하는 풍조가 팽배하고 있을 때인지라, 혼사(婚事)문제 만큼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혹 중매장이가 왔다가도 귀순이의 미모(美貌)만은 아까워할 뿐 누구하나 적극적으로 나서는이가 없었다.   이를 모르는 바 없는 무당 할머니는 연세가 예순이 가까워오자 ‘그동안 애지중지(愛之重之)하게 키운 딸자식인데...’ 하며 딸아이의 시집 보낼 일이 걱정되어 늘 울적한 마음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恨歎)하는 때가 많았다.   가끔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서 귀순이의 나이가 아직 어린데 무얼 그리 걱정하느냐며 위로도 해 드리고 어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가져와 대접해 드리기도 했다. 한편 귀순이도 말을 하지 않고 겉으로 들어내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홀어머니의 그와 같은 근심걱정을 하루라도 빨리 풀어주고 싶어 했다.   이러한 때에 이웃 서당에서는 학동(學童)들의 글 읽는 소리만 매일 요란하게 들려 왔다. 이들 학생은 대개 7, 8세부터 15, 16세의 아동들이 그 중심이 되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스무살 안팎의 늦깎이 총각들도 더러 있었다.   그 중에는 건너마을 놀내(노천)에서 다니는 남씨(南氏)성의 도령(道令)이 있었다. 그는 원근에서 내노라 하는 남부자(南富者)의 귀한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 수발(秀發)하여, 행동거지(行動擧止)로 보나 말하는 품으로 봐서 서당 여는 아이들과는 다르게 장래가 촉망되는 미소년(美少年)이었다.   이제 갓 스물이 된 그는 일찍부터 조부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곳 서당의 이름 높은 스승 밑에서 글을 더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남도령과 같은 또래 중에는 차리밧은(짖궂은) 아이들도 있어, 한참 사춘기(思春期) 때인지라 서당 곁에 사는 귀순이에게 반해 이미 연정(戀情)을 품은 자도 있었다. 이들은 서당 공부가 끝나면 일부러 귀순이네 집앞을 서성거리다가 그녀의 아리따운 미모를 훔쳐보거나 혹은 수작을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악동(惡童)들의 이와 같은 행위와는 달리 남도령은 양반집 자제답게 몸가짐이 발랐으며, 귀순이 역시 남도령의 올바른 행실이 늘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서로 만났거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가난하고 초라한 신분상의 하대 받는 무당의 딸임을 모르는바 아니었지만, 어딘지 저도 모르게 남도령에게 향한 연정의 불길이 타 올랐다.

  그러던 어느날 귀순이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당산(堂山) 밑 모퉁이에서 하학(下學)하는 남도령을 만나 다소곳이 기어드는 목소리로 이윽고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남도령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눈빛이 역역하였다. 그럴 것이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하여 내외가 심하였던 때라 처녀가 길가에서 터놓고 구애(求愛)를 해 왔으니 말이다.   그는 이미 문리(文理: 사물을 깨달음)가 나 있던 터라 그냥 외면하고 지나칠 수 없었던지, “그대의 말을 듣자오니 몸둘바를 모르겠소. 나는 지금 공부하는 몸이니 그럴 계제(階梯)가 아직 못되오” 하고 천천히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자신에게 돌아온 귀순이는 그가 한없이 야속하고 무정함을 느꼈다. 감수성이 예민한 그녀는 무안과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모르고 그 길로 집에 돌아와 몸져 눕고 말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구곡간장을 에는 듯한 그녀의 슬픈 사연을 애달파 하듯 부엉새가 울었다. 잠못 이루는 밤을 부엉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는 귀순이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겨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딸아이의 병이 예사롭지 않음을 안 할머니는, 타고난 숙명(宿命)이라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병을 고치기 위해 굿도 해보고 칠성단(七星壇)에 정화수를 떠 놓고 아침 저녁으로 칠원성군(七元星君)의 일곱 신(북두칠성)께 정성껏 빌었다.   그러나 홀어머니의 이토록 애달파 하며 간구(懇求)하는 소원에도 불구하고 마음에서 생긴병을 어찌 고칠 수가 있었으랴. 그녀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피어보지 못하고 사랑병(상사병)을 앓은지 석달 여일만에 몇 번이고 남도령을 부르다가 통한(痛恨)과 애증(愛憎)을 가슴에 묻은채 숨을 거두었다.   할머니는 외동 딸 잃은 슬픔에 젖어 밤낮 없이 오열(嗚咽)을 터뜨렸으나 이미 저승으로 간 딸자식이 되살아 날 리가 없었다.   동네 사람도 모두 자기의 딸처럼 귀순이의 죽음을 가엾고 애처롭게 여긴 나머지 시신을 거두워 장례를 치뤄주고, 할머니를 위로해 주는가 하면 명명지하(冥冥地下)에서나마 극락왕생할 것을 빌었다.   한편 놀래에 사는 도령의 부모는 무당의 딸 귀순이가 아들을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에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아들을 더 이상 서당에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죄책감에 사로잡힌 남도령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때때로 산에 올라 그녀의 명복(冥福)을 빌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는 잠결에 온 몸이 서늘하고 무엇인가가 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눈을 떠 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보기에도 끔직하고 징그러운 구렁이 한 마리가 자신의 하반신을 휘감고 있지 않은가.   “허억! 어머니...”   하고 그는 소스라치게 놀래서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잠결에 이 소리를 듣고 남부자(南富者)의 부인은 아이 혼자 자는 방에 누가 들어 갔을까 하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또다시 “어머니, 어서요...” 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수상쩍음을 느낀 부인이 방문을 열고 방안을 살펴 보았다.   ‘원 세상에 이럴 수가...’   방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한데, 아들의 하반신을 휘감은 구렁이가 대가리를 곧추 세우고 가느다란 두 갈래의 혓바닥을 나불거리고 있지 않은가.   부인은 이처럼 끔직한 광경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쥐어 안고 “아가, 나다 어미가 왔으니 놀라지 마라”하고 아들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니, 배암은 느슨하게 감고 있던 아들의 몸뚱이를 다시 죄어드는 것이었다.   예부터 그리워하는 남자나 여자의 몸에 붙어 다니다는 상사(相思)뱀이 있다더니, 부인은 얼핏 얼마전 무당의 딸 귀순이가 죽어서 극락환생 하지 못하고 큰 구렁이로 환생(還生)하여 아들의 몸에 붙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한동안 넋을 잃고 있던 부인은 큰 방의 지아비를 불렀다. 와서 보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하고 아들은 목이 터져라고 부르다 그만 지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두 내외는 아들이 가엾어서 하늘이 꺼져라 한숨만 쉴뿐 아들의 몸에서 구렁이를 떼놓을 수가 없었다.   날이 밝아 안채에서 일어난 간밤의 일을 알게된 가인(家人)들이 긴 막대기를 들고와 방안의 구렁이를 ?아내려고 하자 오히려 분노에 찬듯한 눈빛으로 혓바닥을 나불거리는가 하면 도령의 몸뚱아리를 칭칭 감아죄는 것이었다.   귀순 처녀의 환생이라 깨달은 남도령은 간신히 구렁이의 몸뚱아리를 쓰다듬에 주니, 느슨하게 몸을 풀기는 하는데 몸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에 남부자 내외는 하는 수 없이 술사(術士)를 데려와서 부적(符籍)을 붙이고 주문(呪文)을 외우는 한편 몇날이고 굿거리를 벌리는 등 온갖 방술(方術)을 다 해 보았으니 구렁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남도령은 바깥에도 나갈 수 없고 또 동네 친구들이 찾아와도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오로지 방에만 갇혀 있어야 함으로 답답한 마음 풀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문득 산에 오르고 싶었다.   “아버지, 나 저 산에 갔다 올래요”   “그건 안돼” “저산(이구산)에는 맑고 찬 샘도 있고, 그 위에 바우가 있는데 한 번 올라가 보겠어요”   “안된다니까 !”   아버지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남도령은 더욱 오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날 그는 부모 몰래 구렁이가 자신의 하지에 붙어있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산으로 가 바위에 올라 앉았다.   사방을 둘러 보았다. 저 멀리 서당에서는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해가 벌써 졌는지 어둠살이 온 산에 짙게 깔리고 하늘에 는 난데없이 먹장같은 구름이 몰려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붙어 있는 구렁이를 쳐다 보았다. 마치 방긋 하듯 혀를 나불거렸다. 그녀의 넋이 죽어서까지 나를 이토록 못잊어 그리워 하는구나 생각하니 와락 연민(憐憫)의 정을 느꼈다.   이왕 흉살스런 운명으로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만 못했다. 그래서 이승에서 못다 이룬 사랑이지만 저승에라도 가서 그녀의 사랑을 받아 주리라 굳게 마음 먹었다.   “아버지! 어머니! 불효자식을 용서하이소”   집을 향해 절을 하고 그만 바위덩이에서 몸을 날렸다.   산자락에서는 이와 같은 젊은이의 애련(哀憐)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손에 손에 관솔불을 들고 산으로 치달아 올랐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숨져 있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 이야기에 나오는 바위를 지금도 상사바우(바위)라 일컬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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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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