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장사(壯士)바우와 용소(龍沼)   전국 여느 고장과 마찬가지로 우리 고장에도 풍수지리설에 의한 설화(說話)들이 많음을 볼 수가 있다.   그 중에는 정동면 장산리의 장사바우와 용소, 용현면 온정리의 아기장수와 용머리, 곤명면 삼정리의 백마산과 아기장수, 같은 면 연향마을의 장사바우 등을 꼽을 수가 있는데, 이는 모두 아기장수와 관련된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옛날에는 천하(天下)를 주름잡을 이인(異人)이 태어나면 외적을 무찌르고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룰 장재(將材)감이라 하여 키울 생각을 하지 않고 태어나는 족족 죽여 없앴다. 심지어는 집안까지도 멸했으며 태어난 고장을 반역향(反逆鄕)이라 하여 박해를 했다.   반역향이란 조선시대에 반란이 일어나 이에 동조한 지방을 말하는데, 함경도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호남지방이 정여립(鄭汝立)의 역모로, 영남 우도(右道) 지방인 안음(安陰)에서 정희량(鄭希亮), 이웅좌(李熊佐)가 일으킨 무신의 난으로, 평안도 지방이 홍경래(洪景來)의 난으로 반역향으로 낙인 찍혀 푸대접받은 사실(史實)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특히 영남 우도(합천, 거창, 함양지역)에서 일어났던 무신난(1728년) 즉, 정희량의 난은 불과 10여일만에 진압된 미미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중앙권력층들은 이 사건을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보고 영남 우도의 사족(士族)들을 철저히 탄압함으로써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를 막았다. 그리고 좁은 지역으로 사천지방이 이와 같은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반역향>과 같은 푸대접 받은 것은 어쩌면 그 사건의 영향이 오래도록 미쳤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한편, 본면 장산리 노천(魯川)부락은 사천강의 중류(中流)에 위치하는데, 그 지형의 형국이 노루목과 같다 하여 옛날부터 노루내(놀내) 즉, 장천(獐川)이라 불렀다. 두 취락으로 구성된 부락은 이구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안놀내(安魯內)가 자리하고, 다른 하나는 내를 끼고 형성한 바깥놀내(外魯川 또는 外獐川)가 있다.   바깥놀내 주위는 사천강이 굽이돌아 흐르고, 그 배후 동쪽에는 창공을 향하여 우람하게 치솟은 용소산(龍沼山)이 의연한 자태로 이구산을 우러러보고 있다. 일명 용두산(龍頭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세가 용의 형국을 하고 있는데다 산등성이 벼랑 밑에 깊은 용소(龍沼)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용과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이 산에 올라 나무를 베거나 투장(偸葬, 암장)같은 묘를 쓰면 반드시 해를 입는다는 속설(俗說)이 있으며, 6.25전쟁 때는 미군과 적 인민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져 피아간 많은 희생자를 낸 산이기도 하다.   또 산등성이에 오르면 장골 여남은 사람이 앉고도 남을만 한 펑퍼짐하게 생긴 바위덩이가 있는데, 예로부터 휘영청 달밝은 밤이면 신선(神仙)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바위로 이름하여 <장사바우>라 했다.   때는 임진왜란 7년전쟁의 마지막 해인 무술년(戊戌年) 시월, 사천 신채(新寨:현 선진리성)싸움이 있은 후 왜적들이 이 땅에서 물러갈 즈음.   중로제독(中路提督) 동일원(董一元) 휘하의 명장(明將) 이여백(李如柏)이 정병(精兵) 수천명을 거느리고 사천성(泗川城)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사천에서 최후의 육전(陸戰)을 치룬 그는, 어느날 홀가분한 기분으로 군사 수십명을 데리고 사냥길에 나섰다. 이산 저산을 헤매다니다가 이곳 용소산(龍沼山)에 오르게 되었는데, 평퍼짐한 바위가 나타나자 잠깐 쉬는 사이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그러자 먹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면서 천지를 뒤흔드는 청둥소리와 함께 창대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용의 형상을 한 말(龍馬)이 구슬피 울면서 먹구름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   너무도 놀랍고 희한한 일이라 깨어 보니 꿈이었는데, 사방을 휘돌아 보니 갑자기 서기(瑞氣)가 온 산자락을 맴도는 것이었다.   ‘원, 세상에 이런 희한한 꿈이...’하고 생각한 그는 풍수지리에도 밝은터라, 이는 필시 천하(天下)를 주름잡을 장재감이 태어날 조짐임을 감지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에 이러한 곳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해서 성으로 돌아오자 술사(術士)에게 명하여 병졸로 하여금 산의 지맥을 끊는 한편, 꿈 꾸었던 바위덩이에 숯불을 태워 달구어 큰 쇠못을 박아 넣어 그 왕기(旺氣: 왕성한 기운)를 눌렀다고 한다.   그러자 바위 틈에서 쏟아져 나온 검붉은 선혈(鮮血)이 고이다 못해 낭떠러지로 흘러 내렸는데, 한줌의 흙도 없는 그 자리에서 진흙깔의 곧은 전죽(箭竹: 화살대)이 무성하게 자란 것이다.   또한 이 일이 있은 후 산자락 깊은 소에서 용의 형상을 한 말이 나타나 주인 잃은 것을 슬퍼하며 밤중만 되면 뒷산에서 구성진 울음소리로 이레동안이나 울어 장산리 산산골골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한다.   훗날 마을 사람들은 아기장수가 태어날 이 바위를 장사바우라 불렀으며, 천리 준마(千里駿馬)가 될 뻔한 한이 서린 소를 용소(龍沼)라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도 장사바우에 가 보면 그 옛날 쇠못을 박아 넣었다는 흔적이 세곳에 뚜렷하며,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 벼랑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전죽이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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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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