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1. 의(衣)생활    우리의 의생활은 원시시대부터 나뭇잎이나 나무껍질을 이용하여 몸을 가리는 데서부터 출발했음은 익히 아는 바다. 인지(人智)가 발달되어 옷감을 짤 줄 알게 되면서부터 옷감 베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 때는 주로 삼베로 옷을 해 입었고, 지배층에서나 명주, 모시 등을 이용했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엽에 문익점(文益漸) 선생이 원나라로부터 목화를 전래하면서부터 우리의 의생활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목화의 시배지(始培地)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이었음은 우리 도(道)로서는 자랑과 긍지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전통사회의 민속적 의(衣)생활의 모습은 오늘날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삼베옷은 장의(葬儀)나 상복(喪服)으로 겨우 사용하게 되니 삼밭이나 베틀이 불필요하게 되었고, 무명이나 명주옷도 염색과 세탁이 간편한 화학섬유로 바뀌었으며, 모시는 사치스러운 피서복으로 변해버렸다.    8.15 광복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시대의 전통적 옷차림을 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하의로서는 안 속옷 위에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맨 다음 상의로는 속적삼을 입고 저고리를 입은 다음 주머니가 달린 조끼를 입었다. 그 위에 마고자를 입었으며 외출시에는 반드시 두루막을 입어야 했다. 또한 버선을 신고 대님을 매었다. 성인은 상투를 틀고 망건을 졸라매고 갓을 썼다. 또 철에 따라서 토시를 끼엇다. 신은 짚신· 삼신·가죽신·나막신 등을 신었다.    여자들은 하의에는 안속옷을 입은 다음 바지를 입고 단속옷을 입고 나서 치마를 입었다. 상의로는 속적삼을 입고 그 위에 저고리를 입었다. 또 조바위, 남바위 처네를 사용하였으며 신의 종류는 남자와 동일하였다.    옷의 재료는 농민 평상복으로서는 삼베와 무명이었으며 모시, 명주, 비단 등은 고급 외출복이나 예복으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삼베와 무명옷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삼을 재배하였으나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전통적 풍습은 점차 인멸되었고, 광복 후 특히 60년대에 들면서 생활의 과학화로 재래 의생활은 크게 변혁되었다.    이제 관복, 예복, 도포처럼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남·여 평민복장도 대하기 힘든 옛것으로 되었다. 옛날의 옷들은 앉아서 생활하기에 맞도록 되었다.    우리의 바지는 마루와 온돌방에서 생활하기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서양의 문물이 들어와서 생활하기에 편리한 양복차림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한복은 현대사회 생활에 있어서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세계로 진출하고 있는 우리는 생존경쟁을 위해 간편한 옷차림으로 바뀌어 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옷감은 그 명칭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만큼 많은 종류의 화학섬유가 다리미를 없애고 많은 기성복은 재봉틀을 가정에서 몰아내게 하였다. 더구나 1일 생활권에 들어있는 요즈음엔 농어촌이나 도시를 막론하고 복장이 통일화되어 가고 있다.    의생활은 점차 편리하고 간편하게 변모되었으니 새삼스럽게 도포를 입고, 갓을 써야 할 이유도 없으며, 베틀을 놓고 베를 짤 필요도 없고 잿물을 써서 세탁할 일도 없어졌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생활의 장점을 저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속옷으로의 무명은 땀을 흡수하는 데 있어서 합성섬유 보다는 특수한 작용을 하고 있음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의상이 양품 일색으로 변했지만 외출, 혹은 의식에 참석할 때 에 남자의 두루마기 차림과 여인들의 치마저고리 차림이 차차 늘어나고 있는 현상은 다행스런 일이다.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