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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處士晋陽河公墓碣銘幷序   진양천동남인물지부이하씨우전진양지미재고다명향거인강이지금역유행의경술지사왕왕접무이작약공기일야공휘대희자백경성하씨진양지하조자고려벽상공신평장사휘공진위비조사문박사휘탁회이친로해관귀양지휘식증순충보조공신보국숭록대부판사평부사행선관서승진강군련세혁혁수위저성지휘거원증자헌대부병조판서행중정대부전객령치사문충공휘윤지종조고야유휘을부증참판행군기감생휘승해증병조판서행서운부정자헌대부생휘경복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시양정세종조시란대유훈노특몽은권생휘한자헌대부동지중추원사시강장생휘숙부충청절도사시경절시휘삼공휘계부사헌부장령조휘준해문과통훈대부행금정도찰방고휘순통덕랑비진양강씨사인진보녀은열공민첨후생공우현종신축졸영종기유일배밀양박씨사인유장녀유부덕생사남이여장남종일자덕항거정동노천기차원일수증중추부사자덕필거건점우기차주일절충장군자덕응거죽천우차정일무후녀안세유류동임야현증손급이하불록공자시거사천장산개택지이거언공덕성심후지기초연불긍순속부앙렴적림천념정자수일절세리박여야공묘재사천정동면감곡병좌지원이배묘동면대곡청법간산유제단비개후손인세태산재각지이집단치제편의선영하설단고야일일후손등이기가상과여이언왈오조지세기원상궐현각후손방모벌석이표지감청오족등일이청지여이불문사지고이기청유불이명왈 사곡지양삼공유려유사지천공택이거소쇄림천락아권서궐후극창이영종예   세기미 이월 춘분일 족후손 재환 찬         晋陽擅東南人物之府而河氏又專晋陽之美在古多名鄕鉅人降而至今亦有行誼經術之士往往接武而作若公其一也公諱大熙字伯卿姓河氏晋陽之河肇自高麗闢上功臣平章事諱拱辰爲鼻祖四門博士諱卓回以親老解官歸養至諱湜贈純忠輔祚功臣輔國崇祿大夫判司評府事行膳官署丞晋康君連世赫赫遂爲著姓至諱巨源贈資憲大夫兵曹判書行中正大夫典客令致仕文忠公諱崙之從祖考也有諱乙桴贈叅判行軍器監生諱承海贈兵曹判書行書雲副正資憲大夫生諱敬復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諡襄靖世宗朝時亂大有勳勞特蒙恩眷生諱漢資憲大夫同知中樞院事諡剛莊生諱叔溥忠淸節度使諡敬節是諱三公諱季溥司憲府掌令祖諱遵海文科通訓大夫行金井道察訪考諱楯通德郞妣晋陽姜氏士人震輔女殷烈公民瞻后生公于顯宗辛丑卒英宗己酉日配密陽朴氏士人有章女有婦德生四男二女長男宗一子德恒居正東魯川其次元一壽贈中樞府事子德弼居乾占又其次周一折衝將軍子德應居竹川又次淨一無后女安世牖柳東林也玄曾孫及以下不錄公自始居泗川獐山盖擇地而居焉公德性深厚志氣趠然不肯循俗俯仰斂跡林泉恬情自守一切勢利泊如也公墓在泗川正東面甘谷丙坐之原而配墓東面大谷淸法艮山有祭壇碑盖後孫因世態散在各地以集團致祭便宜先塋下設壇故也一日後孫等以其家狀過余而言曰吾祖之世己遠尙闕顯刻後孫方謀伐石以表之敢請吾族等一以廳之余以不文辭之固而其請愈不已銘曰 士谷之陽三公攸廬維泗之川公擇而居蕭灑林泉樂我卷叙厥後克昌以永終譽   歲己未 二月 春分日 族後孫 在煥 撰         晋陽은 오직 동남에서 인물의 府庫이며, 河氏 또한 독특하여 진양의 아름다움이 예부터 많아 名鄕됨은 훌륭한 사람이 탄생한 까닭이며, 지금 역시 올바른 행위와 人道를 경영하는 선비가 이따금 잇달아서 진작하고 흥기하니 公이 거기에 한 분이시다. 공의 휘는 大熙요 자는 伯卿이며 성은 河氏이다.   진양의 하씨는 고려의 闢上功臣 平章事 휘 拱辰이 始祖요, 四門博士 휘 卓回는 어버이 늙으시매 벼슬을 그만 두고 귀가하여 奉親하고, 이르러 휘 湜은 贈純忠輔助功臣 輔國崇祿大夫 判司評府事 行膳官署丞 晋康君이니 대대로 세를 이어 혁혁하게 빛났음으로 마침내 大姓이 되었다. 이르러 휘 巨源은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行中正大夫 典客令으로 致任(관직을 내놓고 물러남)하니 文忠公 휘 崙의 從祖考시다. 또 휘 乙桴는 贈兵曹叅判 行軍器監이며 아들 휘 承海는 贈兵曹判書 行書雲副正 上護軍이요, 아들 휘 敬復은 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으로 시호는 襄靖이며 세종조 때에 북방의 여러 鎭을 오래도록 수어하여 勳勞가 大有하여 특별한 은혜를 입으셨다.   아들 휘 漢은 資憲大夫 同知中樞院事며 시호는 剛莊이요, 아들 휘 叔溥는 忠淸道 兵馬節度使며 시호는 敬節로서 이분이 襄靖公의 셋째 아들이다. 또 넷째아들 휘 季溥는 司憲府 掌令이요, 祖의 후는 遵海니 문과로 通訓大夫 行金井道察訪이며, 考의 휘 楯은 通德郞이며 妣는 晋陽姜氏니 士人 震輔의 따님으로 殷烈公 民瞻의 후예다.   현종 신축(1661년)에 공이 나시고 영조 기유(1729년)에 졸했으니 配는 密陽朴氏며 士人 有章의 따님으로 婦德이 있으셨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宗一이며 손자 德恒이 본면 노천에 살았고, 둘째의 元一은 壽職으로 贈中樞府事며 아들 德弼은 건점에서 살고, 셋째의 周一은 折衝將軍이요 아들 德應은 사남면 죽천에 나가 살았고, 넷째의 淨一은 뒤가 없었다. 사위는 安世牖, 柳東林이라 증손관 현손 이하는 기록치 않는다. 공이 泗川에 들어와 獐山에 始居한 것은 대개 可居地를 가려서 살았기 때문이다. 공의 덕행과 성품이 깊고 두터워서 마음의 지니는 의지가 뛰어나 풍속을 따르지 않았으며, 종적을 감추어 林泉에서 고요함을 지키고 권세와 이익에는 일체 관심이 없었다. 공의 묘는 본면 감곡리의 丙坐이며 配의 묘는 대곡리 청법산의 艮坐인데 제단비가 섰으니, 대개 후손들의 합의에 선조의 제향을 한 곳에서 받들기로 한데서 先塋 아래 설단함이다.   어느날 후손들이 가장을 갖고 나를 찾아와 선조를 위하여 비문을 청하거늘 내 굳이 사양하였으나 그 청이 더욱 간절하여 마지 않은지라 銘하여 가로되, 士谷之陽(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일명 싹실)은 三公(襄靖公, 剛莊公, 敬節公을 두고 일컬음)의 攸廬요 維泗之川은 公擇而居라 蕭灑(말쑥하고 깨끗한 모양)林泉에 樂我卷叙하며 厥後克昌에 以永終譽(오래도록 언제까지나 명예를 잃지 않음)하리라.      서기 一九七九年 二月 春分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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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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