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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別廟(李龜岩先生 祠堂)   이 別廟는 조선조 명종 때의 文臣이자 學者이신 龜巖 李楨선생을 향사하기 위하여 서기 1872년 본면 장산리 대산 마을 529번지에 세운 家廟이다. 본래는 사천읍 구암리의 龜溪書院에서 제향해 왔었으나 한말 때에 大院君의 집정으로 전국의 書院撤廢令에 따라 훼철됨으로서 이곳에다 후손들이 祠堂을 세운 것이다.   구계서원은 선생께서 별세한지 40년뒤인 서기 1611년(광해군 3) 사천의 사림 및 향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龜山祠를 세운데서 비롯되며, 그후 1675년(숙종 1)에 이르러 비로소 龜溪라는 액호가 내려 書院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1723년(경종 3)에는 大司憲을 역임한 醒翁 金德誠선생을 聯享하였다. 그러나 大院君이 섭정하게 되자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철폐하였으며, 세상에 師表가 될 賜額書院 47개의 서원만을 남겨놓고 1871년(고종 8)에 모두 훼철되었다. 이로인해 향례할 길이 막막해지자 사당을 세운 것이 이곳의 별묘이다.   선생은 1512년(중종 7) 12월 23일 사천읍 구암리에서 휘 湛의 큰 아들로 출생하니 휘는楨이요, 자는 剛而이며 호는 龜巖으로 貫은 泗川(東城)이다. 일찍이 童年 때 本道夏課에 나아가 장원함으로써 그 총명함이 들어났으며, 及長하여서는 圭菴 宋麟壽선생(당시에 臺諫이였는데 金安老 등의 악정을 배척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음)에게서 수학하였다.   1536년(중종 31) 2월 진사로 문과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삼사(司憲府, 司諫院, 弘文館 등)의 여러 벼슬을 거치고 榮川郡守를 필두로 淸州牧使, 慶州府尹, 順天牧使 등의 외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1569년(선조 2)에는 副提學에 제수되었으나 先妣 晋陽鄭氏의 지난 3년간의 侍墓살이와 명종임금을 心喪한 뒤인지라 身貌가 극히 쇠약하여 더 이상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1571년 7월 16일 마침내 세상을 뜨시니 享年 60세였다.   생전에 선생께서는 일찍이 학문을 강구하여 性理를 터득함으로서 敬으로 千의 邪惡을 멀리하였으며, 誠으로 萬의 僞善을 물리치고 性의 本인 仁에 들었으나 豊盛한 浩然之氣로 運身을 躬行하고 天命을 따른 學者이면서 師君이었다. 따라서 충절과 대의로 4조(中宗, 仁宗, 明宗, 宣祖)를 섬기었고, 몽매한 백성을 공덕으로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만년에는 향리인 萬竹山 大觀臺齋에 거처하여 후생에게 敎化로서 善導하였으니, 三綱과 四德으로 세상을 밝힌 거울이었다. 뿐더라 退溪 李滉을 비롯하여 南冥 曺植, 玉溪 盧禛 등 여러 儒賢과도 交遊하였으며, 저서로는 性理遺編과 景賢錄, 그리고 遺稿인 龜巖集을 세상에 남겼다.   구계서원 院庭에는 선생의 사적을 새긴 龜巖祠神道碑가 섰으니, 眉叟 許穆선생(조선 숙종 때 문신, 학자로 右議政을 지냄)이 근찬한 碑銘에 가로되, “ 冥은 물에 謹愼하였기에 祭祀하며, 龍은 땅에 勤實하였기에 祭祀하노라. 아! 선생의 가르침 후세에 미치니 마땅히 千萬번 祭祀하여 報食할지어다(冥勤於水而祀 龍勤於土而祀 惟先生敎及於後世 是宜報食於千祀萬祀)”고 하였다.   현재 대산마을 별묘에는 선생의 배위 貞夫人 宜寧沈氏와 함께 내외분을 모시고 해마다 4회(설날, 百中, 秋夕, 冬至)에 걸쳐 후손들이 顯祖에 대한 정성으로 떳떳하게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하며 향사를 받들고 있다. 묘당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목조와가 1동(6평)과 출입문 1동(2평)으로 1972년 4월에 개수하여 선생의 14세손(宗孫) 永道가 수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3世孫 景鍾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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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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