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 尼山齋記   주치남십리허유니구산산지차왈수청촌산포수회협이옥야가독가경가초가어신은자지의매축야왕석숙종지세아칠대조고처사공휘영시거언이고문숙덕기위향당소추중이영묘초재단표이몰세경미득대현우세이시자손추모불기축니구재우촌서협중이우미체지통잉강돈목과현송기승술성업자울연무체이여기손뉴오당숙지수학역재차의역백유수십사이지어광무기해불행회신운잉지지점자차자차오십년우자의광복기축함위갈성발력축와옥오간거구지재수궁지공미흘치세대홍표배지장랑무지역상불가언월사년동시극준공안지왈니산취의어산명야여재칠십리지원불능일일동역인성농이시등임언사초정정방실헌롱각극기제우호공자성이강돈목야여문왈뢰제종지고심혈성변차돌올어천경지복지제소위유지자즉사성연수호역위난장하모이능수장구야함왈무재불가이위수오족지거사방자태육칠십호호출두율세위상준부이조자자이전손기여함전수사모위종시칙기어유지지방서무불속지우의여기칭탄양구첩복유일설언처사공이문학행위저우당시자재지보승파지여송지금불민언칙가험당일실덕지입인심자야위공후승자갈불위천양선덕이이모후인재오호범아종족지거차자수비공기맥전형지유탁재행물이당구위족우이당일균시지심위심독서궁리이술기지돈행칙궁이계기사물이세지치란이유소권저물이기지위능이익구기소미지일이보본추원悙종목족위세세기구칙성하이불부행하이불독재하이불구재고금천하미견성유여이력불족자야제군개상여면지재함왈유유문제상민청기실수서차위기   후손 긍민 근찬         州治南十里許有尼丘山山之此曰洙淸村山抱水回挾以沃野可讀可耕可樵可漁信隱者之宜邁軸也往昔肅宗之世我七代祖考處士公諱永始居焉以高文宿德旣爲鄕黨所推重而英廟初載簞瓢以沒世竟未得大顯于世以是子孫追慕不己築尼丘齋于村西峽中以寓靡逮之痛仍講敦睦課絃誦其承述成業者蔚然無替而如其孫忸烏堂璹之修學亦在此矣歷百有數十祠而至於光武己亥不幸灰燼雲仍之指點咨嗟者且五十年于玆矣光復己丑咸爲竭誠發力築瓦屋五間距舊址纔數弓地功未訖値世大訌褾褙之粧廊廡之役尙不暇焉越四年冬始克竣工顔之曰尼山取義於山名也余在七十里之遠不能一日董役因省壟而始登臨焉戺礎整正房室軒壟各極其制優乎供粢盛而講敦睦也余問曰賴諸宗之苦心血誠辨此突兀於天傾地覆之際所謂有志者卽事成然守護亦爲難將何謀而能壽長久耶咸曰無財不可以爲守吾族之居斯坊者殆六七十戶戶出斗栗歲爲常準父以詔子子以傳孫期與檻前洙泗謀爲終始則其於維持之方庶無不續之虞矣余旣稱嘆良久輒復有一說焉處士公以文學行爲著于當時者載之譜乘播之輿誦至今不泯焉則可驗當日實德之入人深者也爲公後承者曷不爲闡揚先德而貽謨後人哉嗚呼凡我宗族之居此者誰非公氣脈典刑之遺托哉幸勿以堂構爲足尤以當日均視之心爲心讀書窮理以述其志敦行飭躬以繼其事勿以世之治亂而有所勸沮勿以己知爲能而益究其所未知一以報本追遠悙宗睦族爲世世箕裘則誠何以不孚行何以不篤齋何以不久哉古今天下未見誠有餘而力不足者也諸君蓋相與勉之哉咸曰唯唯門弟相敏請其實遂書此爲記   後孫 兢敏 謹撰      사천의 남쪽 십리지점에 尼丘山이 있고, 이구산의 북쪽을 수청동이라 하니 산이 두르고 물이 돌아 沃野를 끼고 있어, 耕讀할 수 있고 漁樵할 수 있으니 마땅히 隱士가 처할 곳이다.   예전 숙종 때 우리 7대祖考 處士公 휘 永이 비로소 살았는데, 高文과 潛德으로 향당에서 추중하였으나, 영조 초년에 몰세하고 마침내 세상에 들어나지 못했으니 이로써 자손들이 추모하여 尼丘齋를 마을 서쪽 골안에 세우고 寓慕하면서 돈목을 講하고 독서하여 이어가며 業을 이룩한 자 盛하였으니, 그 손자 忸烏堂 璹 같은 이의 修學한 곳도 바로 여기이다.   백수십년을 지나 光武 3년 己亥(1899년)에 이르러 불행이도 화재로 소실되니, 자손이 遺墟를 가리키며 한숨 진은지도 또한 50년이다. 光復 5년 己丑(1949년)에 모두가 정성을 다하고 힘을 발하여 와가 5칸을 옛터와 떨어진 村北에 영건하였건만 역을 마치지 못하고 6.25의 대란을 만나 도배도 못하고 부속사도 완성하지 못하였다가 4년을 지난 겨울에 비로소 준공하고 재호를 尼山齋라 정하니 산명을 취한 것이다.   내 70리 밖에 살면서 하루도 역사하지 못하고, 성묘로 인하여 처음 登臨하니 섬돌과 柱 礎가 굳건하고 房室과 軒檻이 제도를 다하여 歲祭 받들고 敦睦 講하기에 매우 훌륭하였다. 내 묻기를 諸宗의 고심과 혈성에 힘입어 이 천지가 반복하는 때에 先齋를 마련하니, 이르는 바 뜻을 가지는 이 성사한 것이나 그러나 수호도 또한 어려우니 장차 어떻게하여 꾀할 것인가.   모두 이르기를, 재물이 없으면 수호할 수 없으니 이곳에 거주하는 친족이 거의 6, 70호나 되므로 戶마다 매년 규정에 따라 出栗하되, 아버지는 아들에게 지시하고 아들은 손자에게 전하여 저 齋前의 泗水처럼 무궁하게 이어가면, 그 유지에는 거의 염려가 없다고 하였다. 내 칭찬하고 한참 뒤에 다시 一說이 있으니, 處士公이 문학과 행위로 당시에 드러남은, 족보에 실렸고, 널리 傳頌되어 이제에 이르도록 不沒하니 당일의 實德이 인심에 깊이 배었음을 징험할 수 있다.   공의 후손되는 이 어찌 선덕을 천양하여 후인에게 法삼게 하지 않겠는가. 아아! 무릇 여기 사는 후손치고 누가 공의 氣脈과 典刑을 이어받지 않았겠는가. 재실을 지었다고 만족하지 말고 더욱 선조의 후손을 위한 마음을 마음삼아 독서와 궁리로 그 뜻을 기술하고, 篤行과 飭身으로 그 일을 이어 세상의 治亂으로 영향받지 말것이며, 자기의 지식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모르는 바를 연구하여 한결같이 報本追遠과 敦宗睦族에 힘써 대대로 家法 삼으면, 정성이 어찌 드러나지 않으며, 행실이 어찌 독실하지 않으며, 재실이 어찌 강구하지 않을소냐.   고금 천하에 정성이 넉넉하면서 힘 부족함을 보지 못했으니, 제군은 어찌 서로 더불어 힘쓰지 않겠는가. 모두 알겠다고 하자 문제 相敏이 기문을 청하므로 드디어 이와 같이 엮어 기문에 갈음한다.   후손 兢敏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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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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