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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진주하씨(晋州河氏) 시랑공후(侍郞公后) 운수당공파(雲水堂公派) (대곡)   진주하씨(晋州河氏) 세 파(派) 가운데 시랑공계(侍郞公系)는 전술한 바와 같이 고려 절신(節臣)의 한 사람인 휘(諱) 공진(拱辰)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공은 현종조(顯宗朝) 초기 난국을 뛰어난 외교로 극복하고 또 스스로 볼모가 되어 적국에 끌려 갔으며, 요주(遼主 : 글안의 聖宗)의 온갖 우대와 회유를 물리치고 환국(還國)을 도모타가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이같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개(節介)는 고려인의 기백(氣魄)과 민족정신을 적국에서 꽃다웁게 발휘한 그 대표적 예로서 후세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문종 6년(1052)에 공부시랑 동평장사(工部侍郞同平章事)에 추증되고 인하여 형상(形像)을 그려 공신각(功臣閣)에 모셨으니 그 사적(事蹟)이 고려사에 상세(詳細)하다. 진주시 남성동 성지내(城址內) 경절사(擎節祠)에 제향되었다.   파계로는 시조로부터 15세손을 전후하여 문충공파(文忠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양정공파(襄靖公派), 운수당공파(雲水堂公派), 둔재공파(遯齋公派) 등으로 나누어지고 대(代)를 이어가다가 다시 여러갈래로 분파(分派)되어 나갔는데, 이중에서 운수당공파와 둔재공파의 후손들이 가장 번창(繁昌)하여 주류(主流)를 이루고, 여기 운수당공(雲水堂公) 파조(派祖) 15세손 윤(潤)은 거제현령(巨濟縣令)을 역임한 계지(繼之 : 14세)의 아들로서 조선 태종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윤(崙)의 현손(玄孫)이다.   윤(潤)의 자는 수부(睟夫)요 호는 운수당(雲水堂), 1483년(성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보직됐다. 4년후 봉교(奉敎)로서 파출(罷黜)되었던 간신 임사홍(任士洪)의 서용(敍用)을 극력 반대했으며, 2년 후에는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영안도(永安道)에 가서 민정을 살피고 이듬해 모친상으로 사직했다. 이후 다시 기용되어 호조, 형조의 좌랑(佐郞)이 되었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으로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시부(詩賦)로서 소요자적(逍遙自適)하여 <운수당실기(雲水堂實記)>를 저술했다. 1498년(연산군 4)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입묘추승(立廟追崇)의 그릇됨을 극간(極諫)하다가 곧 외지인 평안도의 순천군수(順天郡守)로 나가 임오사화(戊午士禍)의 화를 면하였으나 임지에서 병으로 죽었다.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되고, 묘소는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묘좌(卯坐)로 당대의 이름난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이 갈명(碣銘)했다.   19세손 천서(天瑞) 호는 망추정(望楸亭)이며 벼슬은 비관(卑官)으로 참봉(叅奉)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을 일으켜 강득용(姜得龍), 신남(申楠)과 더불어 군대를 훈련시키고 위풍(威風)을 떨치니 군율(軍律)이 자못 엄정하였고 허물어진 진주성(晋州城)을 수축하고 못을 다시 깊이파서 장차를 대비하였다. 뒷날 공이 인정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20세손 경호(慶灝)의 첫이름은 경남(慶男), 자는 사회(士會), 호는 입추헌(泣楸軒)으로 천서(天瑞)의 아들이다. 침랑(寢郞)으로 있을 때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선전관(宣傳官)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을 지냈다. 이는 뛰어난 그의 무술을 인정한 체찰사(體察使) 윤두수(尹斗壽)의 특천에 의해서이다. 윤두수는 그를 촉망하여 중군(中軍)에 불러두고 여러번 공을 세우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서애(西崖) 류성용(柳成龍)에게 글을 보내 이르기를 “하경호가 입을 다물고 자기의 공을 말하지 아니함은 호남 바다의 싸움보다 배나 더 컸다”하였다. 선조께서 의주(義州)길을 재촉하면서도 하경호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며 그를 빨리 불러 내 행차길의 전위(前衛)을 삼으라 했을 정도이다. 뒤에 공조참의(工曹叅議)에 까지 오르고,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증직되어 공신록(功臣錄)에 올랐다.   24세손 한적(漢迪 : 자 而甫)은 1760년(영조 36)생으로 품계는 통덕랑(通德郞)이며, 참판공(慶灝)의 4대손이자 참의공(叅議公) 득형(得亨 : 23세)의 넷째 아들이다. 이분께서 진양 금곡에 사시다가 정동으로 입향하셨기에 입향 연대가 약 210여년 전이라 추산된다. 묘소는 양위분 함께 풍정리 장지골 갑좌(甲坐)이다.   25세손 명인(命仁 : 자 擎仁), 명락(命洛 : 자 擎叔)으로 이들 형제분에서 대곡문중(大谷門中)이 분파(分派)되었으며, 장남인 명인(命仁)의 종손은 31세손 해열(海烈)이고, 명락(命洛)의 종손은 32세손 현철(炫哲)이다.   다음은 입향조 후예들의 면면들이다. • 30세손 진호(振鎬) : 진주시 수정우체국 국장 역임 • 30세손 양호(良鎬) : 경남매일신문사 사천주재 기자 • 30세손 성호(成鎬) : 거재 대우중공업(주) 생산부 작업반장 • 31세손 해주(海周) : 사천여자종합고등학교 교무주임 역임 • 31세손 해윤(海尹) : 마산 지원종합중기 대표 • 31세손 해현(海炫) : 미국 보잉항공사 근무(직책 부장) • 31세손 해동(海東) : 서울시 동작구청 감사계장 • 32세손 도식(度植) : 정동면 의용소방대장 역임 • 32세손 용식(容植) : 밀양중학교 교무주임 • 32세손 문식(文植) : 충북대학교 조교수 • 문중 대표 30세손 순호(順鎬) 대곡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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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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