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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하씨(河氏)의 본관(本貫)과 파(派)   하씨(河氏)의 선계(先系)는 삼한시대(三韓時代)부터 진주의 토성(土姓 : 토착 상류계급)으로서 고려시대에는 성족(盛族)으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선계의 고증할 문헌이 없어 상고(詳考)할 길이 없다.   진주하씨(晋州河氏)는 진주를 비롯하여 81본까지 기록하는 문헌이 있으나 그것은 모두 진주에서 갈린 분파(分派)로서 하씨(河氏)의 세거지(世居地)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진주하씨로 일원화되었다. 그런데 진주하씨의 세계(世系)는 서로 계통을 대지 못하는 세 파(派)로 갈리어 족보(族譜)가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시랑공파(侍郞公派)로 시조(始祖)는 고려 현신(賢臣)의 한 사람인 하공진(河拱辰)이다. 그는 고려 성종 때 압강도 구당사(압강도구당사(鴨江渡句當使)가 되고, 목종(穆宗) 12년(1009년)에 중랑장(中郞將), 상서좌사랑중(尙書左司郞中)이 되었다. 그해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顯宗)을 옹립하자 글안(契丹)의 성종(聖宗)이 강조를 문책한다는 핑계로 고려를 침입해 왔다. 그때 그는 강화교섭사로 적진에 들어가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글안군을 철병시켰다. 누차 탈출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마침내 요주(遼主) 성종의 친국(親鞫)을 받게 되었다. 그때 요주가 “너는 내 신하가 되겠는냐”하고 묻자 그는 “나는 내 나라에 두 마음을 가질 수 없으므로 결단코 요(遼)를 섬길 수 없다.” 하고 버티다가 끝내 절사(節死)하고 말았다. 조선 개국공신이며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하룬(河崙)은 그의 11세손이다.   둘째 사직공파(司直公派)로 시조(始祖)는 고려 정종(靖宗)과 문종대(文宗代)에 사직(司直)을 지낸 하진(河珍)이고, 조선 세종(世宗) 때에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은 그의 12세손이다. 하연과 하륜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政丞)이었으나 서로 계보(系譜)를 상고할 길이 없었던 것 같다. 하연(河演)이 문종 1년 (1451)에 <경태보(景泰譜)>를 처음 내면서 그 서문에      < 오하(吾河)는 진주의 토성으로 백제시대(百濟時代)에 타주(陀州 : 진주의 옛이름)로 불릴 때부터 사대부(士大夫)의 문벌이었으나 세계가 무전(無傳)하고 <고려사>에 나타난 시랑(侍郞) 하공진과 동원(同源)이라 하나 분파 계대(系代)가 확실하지 않고, 또 강인문(姜引文 : 給事)이 정승에게 시를 보냈을 때 하복야(河僕射)라 했을제뿐 휘(諱)를 알 수 없으므로 이를 한탄하여 고려 정종~문종 양조에 자식을 지낸 하진(河珍)을 시조로 하였다.>      고 하였다. 또 다른 한 파는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인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의 집안이다. 흔히 하위지의 호를 따서 단계하씨(丹溪河氏)로 일컬어 지지만 역시 진주하씨이다. 파계를 밝히지 못하고 고려조의 주부(主簿)를 지낸 하성(河成)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진주하씨는 조선조에서 영의정 2명, 호당(湖當) 1명, 공신 2명, 문과 급제자 39명과 많은 학자를 배출한 영남의 명문이다. 그 중에서도 하륜(河崙)과 하연(河演) 그리고 하위지(河緯地)가 두드러진다. 호정(浩亭) 하륜은 순흥부사(順興府事) 하윤린(河允潾)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조선 개국 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어 계룡산 천도(鷄龍山遷都)를 반대, 한양(漢陽 : 지금의 서울) 도읍을 적극 주장했다. 태조(太祖) 7년(1398)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는 방원(芳遠 : 태종)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오르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 되었으며,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공을 세워 진산백(晋山伯)으로 진봉되어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승진되었다.   경재(敬齋) 하연(河演)은 판서공(判書公)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며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문인이다. 조선 태조 때 문과에 급제, 세종조에서 좌, 우의정을 지내고 같은 왕 31년(1449)에 영의정 세자사(世子師)에 올랐다. 문종묘정(文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저서는 <경재집(敬齋集)>을 남겼다. 주부공(主簿公) 하성(河成)의 8세손인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는 하담(河澹)의 아들로 조선조의 충절(忠節)로서 가문을 빛냈으며,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그는 세종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혔고, 단종 때 부제학(副題學)에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지냈다. 세조 2년(1456)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그의 형 강지(綱地)와 아우 기지(紀地) 소지(紹地)도 모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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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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