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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전주최씨(全州崔氏) 안렴사공후(按廉使公后) 찰방공파(察訪公派) (학촌)   전주최씨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4파가 있는데, 그중에 한 파로는 선계를 상고하지 못하고 고려 말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서 명나라에 들어가 당시 복잡한 국내 문제를 해결한 공으로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진 휘 아(阿 : 시호 文成公)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시조 아(阿)의 인맥으로는 그의 네 아들형제 중 첫째의 용생(龍生)은 충정왕 때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지냈고, 둘째의 용각(龍角)은 충숙왕 때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검교대호군(檢校大護軍)을 역임하고 학행과 충절로서 이름이 높았고, 셋째의 용갑(龍甲)은 판사(判事)를, 넷째의 용봉(龍鳳)은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이로써 4형제대에서 각기 안렴사파(按廉使派), 대호군파(大護軍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중랑장파(中郞將派) 등 4대 계파로 갈리었다.   시조의 맏아들 용생(龍生)은 천성이 강직하고 겸정하여 검약함을 지키고 총명함이 남달라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과에 급제, 1350년(충정왕 2)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러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궁궐에서는 내시(內侍)의 무리들이 원나라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믿고, 우리 백성들에게 해독(害毒)을 끼치고 있는 것을 심히 미워하여 그들의 죄악을 방서(榜書)를 붙여서 나라안의 모든 백성들에게 보였던 것이다. 이때 원나라에서 어향사(御香使)로 온 내시 주원지첩목아(朱元之帖木兒)가 이를 보고 시기하여 왕과 공주에게 호소하여 용생 대신 김유겸(金有謙)으로 하여금 안렴사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사주(泗州 : 泗川)로 유배되어, 가족을 거느리고 지금의 풍정리 장령골(掌令谷)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일생을 마쳤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세장지를 떠나 흩어져 살았는데, 이의 영남에서 사는 전주최씨의 종족(宗族)들은 모두 공의 후손이라 전하고 있다. 공의 묘소는 풍정동 곤향(坤向)이라고만 전할 뿐 실묘되어 찾을 수가 없고, 지금은 후손들이 선조의 유허지(遺墟址)라고 짐작되는 곳에 옥산재(玉山齋)를 짓고 그 후정(後庭)에 설단하여 매년 음력 10월 초이틀 날 향사(享祀)하고 있다.   시조의 6세손 자경(子涇)은 안렴사공의 현손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한 사필(斯泌)의 아들이다. 진사로서 개령현감(開寧縣監)으로 있을때 문과에 급제, 증직 판사(判事)의 직함이 내렸다. 이분께서 처음으로 선향인 사천을 떠나 당시 진주 강주촌(康州村 : 현 진주시 정촌면 강지마을)으로 이거(移居)하여 살았다.(事載晋陽誌)   7세손 수지(水智 : 자 潤甫, 호 儉齋)는 일찍이 허경암(許敬庵)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1453년(단종 1) 진사에 등제하여 옥당응교(玉堂應敎), 행비안현감(行比安縣監)을 거쳐 홍문관,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상서원정(尙瑞院正)으로 있을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 연경(燕京)을 다녀왔는데 그때 명제(命帝)로부터 상으로 하사받은 주자서(朱子書)를 가지고 왔다. 공은 대구에서 살았는데 묘소는 선산(善山) 조계산 아래 오리동 곤향(坤向)이며 유갈(有碣)하다.   10세손 담(潭) 호는 둔암(遯庵)으로 전주최씨 입고성(入固城)한 중조시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하에서 유행(儒行)을 공부하였다. 덕릉창봉(德陵叅奉)을 지냈으며, 손자 균(均 :12세손)과 강(堈)이 임진란 때 세운 훈공으로 한성우윤(漢城右尹)의 직함으로 증직되었다.   12세손 균(均 : 자 汝平) 담(潭)의 손자로 11세손 운철(云哲)의 아들 형제중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소호(蘇湖)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주역(周易)은 물론 천문, 지리에까지 통달했다. 임진란에 아우 강(堈 : 시호 義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풍운장(風雲將)이라 자칭 고성, 사천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수문장(守門將)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도 형제가 함께 무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창의록훈(倡義錄勳)에 올랐으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도 전공을 세웠다. 만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 고성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13세손 흥보(興虎 : 자 文仲)는 통덕랑(通德郞)으로 가선대부 균(均)의 맏아들. 임진란때 아버지를 의병진소(義兵陳所)에서 지성껏 모시고 측근에서 중요한 군무를 도맡아 도왔으며, 흩어져 달아나는 장병을 불러모아 기발한 책략으로 재치있게 적을 잡아 목을 자르는 등 영남 일대와 진주싸움에서 각각 많은 전공을 세워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공신록에 등재되었다.   14세손 홍(洪 : 자 而遠)은 통덕랑(興虎)의 둘째 아들로 1589년(선조 22)에 출생. 벼슬은 평구도 찰방(平丘道察訪)을 지냈으며 증진 군자감정(軍資監正)을 받았다. 이분께서 전주최씨 안렴사공파 중계 이후의 찰방공파 파조시다.   안렴사공파 중계 이후의 파계는 찰방공파를 비롯하여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의숙공파(義肅公派), 참봉공파(叅奉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정언공파(正言公派) 등 무려 31개 파로 분파되었는데, 이 가운데 찰방공파, 통덕랑공파, 통훈공파, 참봉공파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입향조 24세손 기모(奇模 : 자 廷鎬, 호 序光)께서 1932년(壬申) 고성 망림(望林)에서 사시다가 입사천(入泗川), 본면 학촌에 정착하였으니 실로 선대 이래 다시 조향(祖鄕)으로 환향(還鄕)한 셈이 되었다. 묘소는 학촌 곤내 병좌(丙坐).   이후 후손들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 25세손 낙선(洛善) : 자는 춘파(春坡) 호는 정원(亭園)으로 문중(門中, 鶴村) 대표이다. • 26세손 성림(盛林) : 울산 아성목재 대표 • 26세손 덕림(悳林) : 의령레미콘(주) 관리부장 • 26세손 부림(富林) : 진주 복음병원 치과실장 • 26세손 재철(載喆) : 울산 아성목재 관리부장 • 26세손 석림(晳林) : 진주 한보건설(주) 경리부장 • 26세손 양림(良林) : 창원 양곡중학교 교사 • 27세손 원석(元錫) : 서울 이.미용업 대표 • 27세손 윤석(潤錫) : 부산 장림의류도매상 대표 • 27세손 형석(亨錫) : 진주 영진산업(주) 공무주임 • 27세손 효석(孝錫) : 진해 동야증권(내) 명신관리(주) 전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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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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