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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삭녕최씨(朔寧崔氏)의 본관(本貫)과 파(派)   최씨(崔氏)의 본관(本貫)은 문헌에 대략 3백여 본(本)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거의가 후손들이 거주지명(居住地名)을 나타내는 것일 뿐으로 그 중 시조(始祖)가 분명히 밝혀져 있고 후손들이 현존하는 성씨(姓氏) 30여 본에 지나지 않는다.   최씨의 원조(元祖)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 6촌(村) 중의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 沙梁部)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6촌에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 등 6성을 각각 사성(賜姓)한 것이 서시 32년(신라 유리왕 9)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학자들은 우리나라에 사성제도가 생긴 것은 중국 문화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한 5~6세기경 부터라고 보고 있다. 어쨌든 소벌도리(蘇伐都利)를 범최씨(汎崔氏)의 원조로 하는 최씨(崔氏)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씨족의 하나로 역사상 숱한 명신, 학자, 문인을 배출한 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명문 거족(名門巨族)이다.   30여 본 가운데 관향(貫鄕)을 삭녕(朔寧)으로 하는 지명은, 연천군(漣川郡)과 철원군(鐵原郡)의 일부지역을 차지했던 곳으로 본래는 고구려 소읍두현(所邑豆縣)인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 472~764)이 삭읍(朔邑)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 9년(1018)에는 동주(東州 : 철원)에 속했으며, 예종 1년(1106)에 승령현(僧嶺縣) 감무(監務)를 겸하여 삭녕(朔寧)으로 고쳤다. 조선 태종(太宗) 14년(1414) 안협현(安峽縣)을 통합하여 안삭군(安朔郡)이 되어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고종 32년(1895)에 군(郡)으로 되어 삭녕군(朔寧郡)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군이 폐지되고 내문면(內文面), 인목면(寅目面), 마장면(馬場面)은 강원 철원군에 속하고, 나머지는 경기도 연천군에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조는 휘(諱) 천로(天老)로서 고려조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정2품)를 지냈다. 그리고 그의 후손 유가(瑜價)는 고려 명종 20년(1190)에 국자감 대사성(國子監大司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문헌이 실전되어 시조 천로(天老)와 유가(瑜價)와의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고, 또다시 유가 이후 4세의 세계가 실전되었다. 그래서 천로를 시조로, 유가를 원조(遠祖)로 하고 그의 후손인 친어모군 낭장(親禦侮軍郎將)을 지낸 휘 선보(善甫)를 낭장공파(郎將公派) 1세조로, 함경전부사(含慶殿副使)를 역임한 휘 연(珚)을 부사공파(副使公派)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삭녕최씨의 종파(宗派) 세계는 위에서 말한 바 낭장공파와 부사공파로 크게 대별(大別)하는데, 이 두 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파로 분파(分派)되어 나갔다.   첫째, 낭장공파(郎將公派)는 상계(上系) 7세대(代)를 전후하여 통진파(通津派), 양구파(楊口派), 삭녕파(朔寧派), 문정공종파(文靖公宗派), 개성파(開城派), 경파(京派) 등으로 갈리었다.   둘째, 부사공파(副使公派)는 상계 6세에서 진위파(振威派 : 敎導公派), 사천파(泗川派 : 司正公派), 진주파(晋州派 : 副司正公派), 만경파(萬頃派縣監公派) 등 4파로 나뉘어졌으며, 이중에서 사천파는 중계(仲系) 12세에서 다시 8파로 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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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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