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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영양천씨(穎陽千氏) 처사공파(處士公派) (감곡)   천씨(千氏)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서, 97본관(本貫)으로 나타나 있으나 모두 영양천씨(穎陽千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을 나타낸 것이다. 시조(始祖) 휘 암(巖)은 중국(中國) 서촉(西蜀)의 천고봉 만인암(千古峰萬仁巖)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 지명을 따서 성을 천(千)으로 하고 이름을 암(巖)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시조 암(巖)은 명나라 홍무(洪武) 1년(서기 1368년) 도총장(都摠將)을 지내며 나라에 공훈(功勳)을 세워 판도승상(版圖丞相)에 이르렀고,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을 역임하여 영양(潁陽)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으므로 본관을 영양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중시조(中始祖) 휘 만리(萬里 : 자 遠之, 思庵, 시호 忠壯)는 명나라 말기 무과에 급제, 명나라 조정의 무신으로 있다가 1592년(선조 25 : 萬曆 20) 임진왜란 때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영양사(領糧使) 겸 총독장(摠督將)으로 아들 상(祥), 희(禧)와 함께 우리나라에 건너와 평양(平壤), 곽산(郭山) 등지에서 대첩(大捷)을 거두고, 정유재란(1597년) 때도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제독(提督) 마귀(麻貴) 등과 함께 다시 나와 직산(稷山), 울산(蔚山)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는 명군이 본국으로 철수할 때 그대로 머물러 귀화하니 조정에서 가상(嘉尙)히 여겨 자헌대부봉조하(資憲大夫奉朝賀)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했다. 그 후 숙종때 그의 전공을 길이 빛내기 위해 대보단(大報壇)을 설치, 종향(從享)했고, 전국 10여개 서원(書院)에 향사되었다. 그리고 묘소는 전북 남원군 금지면 방촌리에 있는데 세칭 천장군묘(千將軍墓)로 불리고 있다. 고성 동해면 장좌리 호암서원(虎巖書院 : 순조 때 건립)에서 매년 8월 1일에 향사한다.   중조 만리(萬里)의 맏아들 상(祥)은 임진왜란 때 참전하였고 정유재란 때도 많은 공훈을 세웠으며, 차남 희(禧)는 형 상(祥)과 함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공이 컸고, 효성이 지극하고 사후에 형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파계는 맏아들 상(祥, 左尹公)이 아들 6형제를 두어 1자 태지(泰智)는 처사공파(處士公派)의 파조(派祖)가 되고, 2자 경주(耕疇)는 선전공파(宣傳公派)의 파조, 3자 태주(泰疇)는 정랑공파(正郞公派)의 파조, 4자 태진(泰進)과 5자 태석(泰釋)은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의 파조, 6자 태종(泰鐘)은 송암공파(松庵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그리고 차자 희(禧 : 祭訪公) 또한 네분의 형제를 두어 1자 운주(耘疇)는 영장공파(營將公派), 2자 거주(耟疇)는 군수공파(郡守公派), 3자 자주(耔疇)는 현감공파(縣監公派), 4자 장주(長疇)는 감역공파(監役公派)의 파조로서 모두 9대 계파로 갈라졌다.   이 중에 처사공(處士公) 태지(泰智 : 자는 精峀)의 호는 둔암(遯庵)이다. 여러 아우들과 사촌들은 모두 벼슬길에 올랐으나 자신은 둔암도인(遯庵道人)으로 자처(自處)하며 처사(處士)로서 행훤(行諠)하여 후에 처사공파(處士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입향조 9세손 세봉(世奉 : 자 汝雲)은 처사공 태지(泰智)의 6대손으로 1865년경 진양 이반성(二班城)에서 입향했다.   2대 정동면의회 의원을 역임한 12세손 축생(丑生)의 증조고(曾祖考)이다.   문중 대표 13세손 을태(乙泰) 감곡리 이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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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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