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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신안주씨(新安朱氏) 문간공후(文簡公后) 무렬공파(武烈公派) (감곡)   신안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는 주희(朱熹)로써 중조(中祖) 휘(諱) 잠(潛)은 중국 송(宋)나라 신안현(新安縣) 사람이다. 그는 고려 고종(高宗 : 1214~1259) 때 동래(東來)하여 나주(羅州)에 정착하게 되면서부터 그를 동국(東國)의 시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다.   주자(朱子 : 본명은 熹, 성리학을 대성한 南宋의 유학자)의 증손 잠(潛)은 송나라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되자 아들 여경(餘慶)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망명해 와서 금성(錦城 : 지금의 나주)에 세거(世居)하였다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원(元)나라에서 송(宋)의 유민(遺民)을 압송하려 했을 때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능성(綾城 : 지금의 능주) 효정리(孝亭里)에 은거하였다가 그의 후손들이 각지에 산거(散居)하는 동안 그 거주지를 본관으로 삼아 능주(綾州), 나주(羅州), 전주(全州), 함흥(咸興) 등 많은 본관을 써오다가 1902년(고종 39)에 의정부찬정(義政府贊政) 석면(錫冕)의 상소로 선조의 본향(本鄕)인 신안(新安)을 본관(本貫)으로 통합하게 되었다.   동국시조(東國始祖) 잠(潛)의 아들 여경(餘慶)이 고려 고종 때 은사과(恩賜科)에 올랐고, 여경의 아들 열(悅)은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남원판관(南原判官), 학록(學錄), 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을 거쳐 나주, 정주(靜州 : 지금의 영광(靈光), 승천부(昇天府 : 지금의 순천(順天), 장흥부(長興府) 등의 수령(守令)으로 치적(治績)을 올렸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 후 한림학사(翰林學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지냈고 충렬왕(忠烈王) 때는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에 이르러 능성군(綾城君)에 봉해졌다.   능성군(悅)의 아들 3형제 중 맏아들 인장(印長 , 시조의 7세)은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고 시호는 정숙(正肅)이며, 둘째 아들 인원(印遠)은 1301년(충렬왕 27)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 겸 근농사(勤農使)를 거쳐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역임하고 시호는 문간(文簡)을, 셋째 아들 인환(印還)은 첨의부사(僉議府事)를 역임하여 신안주씨(新安朱氏) 가문을 중흥(中興)시켰다.   그리고 이들 3형제에서 그 후손들은 정숙공파(正肅公派 : 長派), 문간공파(文簡公派 : 中派), 부사공파(府事公派 : 季派)로 갈리었는데, 각 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다.   시조(熹)의 19세손이자 문간공(印遠)의 12세손인 몽룡(夢龍)은 1563(명종 18) 정동 몽대(夢垈 : 현 獐山里 垈山마을)에서 입향조(入鄕祖) 읍(浥)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운중(雲仲)이요 호는 용암(龍巖)으로서 시호(諡號)는 무렬(武烈)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한 후에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군수(金山郡守 : 현 金陵郡)로 의병장 강덕룡(姜德龍), 정기룡(鄭起龍) 등과 함께 거창 우지현(牛旨峴) 싸움에서 용전, 왜군을 격파하여 영남(嶺南)의 3룡(龍)으로 불렸다. 이어 의령의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들어가 부장(副將)으로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서 적군을 크게 격파했고, 이어 거제(巨濟)에 주둔한 적을 협공할 때 참전, 용맹을 떨쳤다. 1602년(선조 35) 앞서 역적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했다는 모함(謀陷)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다. 뒤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 태인(泰仁)의 충렬사(忠烈祠), 진주의 평천서원(平川書院), 의려의 충익사(忠翼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무렬공파(武烈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묘소는 진주시 내동면(奈洞面) 삼계리(三溪里) 칠봉산(七峰山) 묘좌(卯坐)이다.   공의 아들 20세손 인달(仁達 : 자 義守) 또한 무과에 올라 병절교위(秉節校尉)로서 임진란 때 공을 세워 공신록권(功臣錄卷)에 책록되었다. 21세손 무명(武鳴 : 仁達의 7子)의 자는 영지(永之)로서 통덕랑(通德郞)을, 22세손 대관(大寬)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고, 23세손 성(晟)의 자 천일(天一)인데 수직(壽職)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함(職銜)을 받았다.   또 24세손 세적(世迪 : 자 瑞龍)은 성(晟)의 차자로 무관 무직이었고, 그의 둘째 아들 25세손 성태(成泰 : 자 時淵)가 거제로 이주하여 살았다. 26세손 혁(赫 : 자 德老)은 증직 통덕랑, 27세손 경유(景裕 : 자 大擧)는 참봉(叅奉)인데 선조의 세거지(世居地)인 진주로 돌아와 가계(家系)를 이었다.   30세손 위수(渭水)의 자는 사순(士順)인테 진주에서 선향(先鄕)인 사천으로 환향(還鄕)하여 정동 감곡(甘谷)에 정착했으며, 조고(祖考)는 백도(白道), 부조(父祖)는 한원(漢元)이다.   문중 대표는 34세손 영희(瑛熙 : 31세 明俊의 증손)로 서울에 거주하고, 종손은 35세손 지영(址榮 : 31세 明俊 직계 玄孫)으로서 34세손 만갑(萬甲)의 2남 6녀 중 맏이로 감곡에 살고 있다.   문중 재실은 정동면 감곡리에 덕문재(德門齋)가 건립되어 해마다 음력 10월 셋째 일요일에 후손들이 모여 선조를 기리며 제향하고 있다.   분포 : 손세(孫勢)는 약 50호에 달했으나 시대 변천에 따라 지금은 거의 진주, 마산, 부산 등 경향각지로 떠나 살고 현재 감곡에는 4호가 선영(先塋)을 지키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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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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