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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함안조씨(咸安趙氏) 절도공파(節度公派), 부윤공파(府尹公派) (대산)   함안조씨의 시조(始祖)는 원윤공(元尹公-忠壯公)으로 휘는 정(鼎), 자는 우보(禹寶), 호는 모당(慕唐)이니 본래 중국의 후당(後唐) 사람이다. 신라 말기에 두동생 부(釜)와 당(鐺)을 데리고 절강인(浙江人) 장길(張吉)과 함께 고려에 동래(東來)하였다고 한다. 그는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陜川)에서 기의(起義), 서기 931년(태조 14) 고창성(古昌城)에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을 대파(大破)하고 동경주현(東京州縣)을 공략하여 삼한통합(三韓統合)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은 함안(咸安)에 정착(定着)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함안(咸安)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시조의 아들 간(幹)이 고려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했으며, 증손 시우(時雨 4세)는 오위도영장(五衛都領將), 영준(英俊 : 4세)은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내니 크게 2대계로 대별된다.   시조의 12세손 여(旅)의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은자(漁溪隱者), 시호는 정절(貞節)이며, 공조전서(工曹典書) 열(悅 :10세)의 손자. 1453년(단종 1) 진사가 되고,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세조(世祖)가 왕위를 찬탈하자 그 불의(不義)에 항거, 벼슬할 뜻을 버리고 고향인 함안(咸安)으로 돌아와 세상을 비관하고, 종산(宗山)인 백이산(百夷山) 밑에 은거(隱居)하면서 독서와 낚시질로서 여생을 보낸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1698년(숙종 24) 단종이 추복(追復)되자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추증, 정조 때 이조판서에 다시 추증되었다. 1703년 함안(咸安)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에 <어계집(漁溪集)>이 있다.   13세손 금호(金虎 : 자 壽翁)는 어계(漁溪)선생의 둘째 아들로 1466년(세조 12) 무과(武科)에 등제하고, 이듬해 길주인(吉州人) 이시애(李施愛) 등이 반란하여 북방 관리들을 대량 살해하자 서정(西征)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경상도 수군 우후(水軍虞侯)에 제수(除授)되었다. 이후 오읍(五邑)의 훈련부정(訓練副正)을 역임하고, 녹정국원종훈(錄靖國原從勳)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향년 89수를 누리고 타계하니 가의대부(嘉義大夫)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14세손 수천(壽千)의 자는 중수(仲叟)요 호는 북계(北溪)로서 좌윤공(左尹公) 금호(金虎)의 둘째 아들. 1482년 임인(壬寅)생으로 1503(연산군 9) 무과에 등제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선전관(宣傳官)으로서 공을 세워 정국원종(靖國原從) 1등으로 책록되고, 용예(勇藝)가 뛰어나 초배(初拜)로 함흥부사(咸興府使)가 되고 후제(後除)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역임하였다. 그후 다시 외직(外職)으로 나가 충청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니 절도공파(節度公派)의 파조(派祖)시다.   17세손 의탁(義卓 : 자 子敬)은 절도공 수천(壽千)의 2자인 응기(應箕)의 손자로 부조(父祖)는 현(玹)이시다. 1624년 갑자(甲子)생으로 조부(祖父)때부터 사천 용현으로 이거(移居) 정착하였으며, 질계(耋階) 한성부윤(漢城府尹)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으로 증직되었다. 그리고 아우 석문(碩文)은 승의랑(承義郞), 재종형 현도(顯道 : 壽千의 直系 증손)는 승훈랑(承訓郞)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지냈는데 이로써 절도공파(節度公派)의 후예들은 증손대에 와서 부윤공파(府尹公派 : 義卓), 승의공파(承義公派 : 碩文) 도사공파(都事公派 : 顯道) 등으로 다시 나뉘어졌다. 부윤공(府尹公) 의탁(義卓)의 묘소는 용현 개치산(介峙山) 임좌(壬坐).   입정동(入正東)한 입향조는 25세손 숙식(淑植 : 자 성식)으로 조고(祖考)는 23세손 광묵(光黙), 부조(父祖)는 상재(相滓)로서 용현에서 정동 대산(垈山)으로 이거(移居)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앞서 처음으로 입정도한 선조(先祖)는 부윤공의 방손(傍孫)인 성균진사(成均進士) 수완(壽完 : 초휘 重完, 호 和白, 22세손)이다.   그는 사천읍에 살 때, 허물어져가는 동사(동사(洞舍))를 새로 지은 것을 필두로 거금을 내어 학교를 세우는 등 육영사업(育英事業)과 제반 공중사업(公衆事業)을 펼쳐 향토발전(鄕土發展)에 크게 공헌(貢獻)하였다. 특히 흉년(凶年)이 들었을 때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救恤)했는데, 뒤에 공(公)의 위적(偉績)을 기리기 위해 향인(鄕人)들이 1875년(고종 12) 입석(立石) 불망(不忘)하니 이 비(碑)가 현재 사천 성지(泗川城址 : 현 山城公園) 서편에 서 있다. 공은 뒤에 가산이 기울어져 정동 소곡리로 이거하여 살았으며, 그 후손들이 고성으로 다시 이주하여 살고 있다. 묘소는 정동 감곡 외치산(外峙山) 손좌(巽坐).   문중 대표(代表)는 26세손 홍구(洪九 : 자 諸祚)이며, 종손 27세손 상규(相奎)는 부산에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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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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