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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칠원제씨(漆原諸氏) 부원군후(府院君后) 고봉파(高峯派) (수청, 대곡)   제씨(諸氏)는 본래 복성(複姓)인 제갈(諸葛)씨에서 갈려나온 성씨로서, 그 연원은 중국 주(周)나라 때 우림장군(羽林將軍)을 지낸 제갈영(諸葛嬰)이 원조(遠祖)이다. 우리나라에서 본관은 문헌에 칠원(漆原)과 의성(義城) 2본(本)이 전하지만 의성제씨는 현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칠원제씨보(漆原諸氏世譜)>에 의하면, 제갈량(諸葛亮)의 증손 제갈충(諸葛忠)이 나이 13세가 되던 해 부형(父兄)이 모두 순절하자 신라 미추왕(味鄒王 : 262~283)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밭을 갈고 글을 읽으며 살았다 한다. 그의 후손 한(漢)은 고려 현종(顯宗)이 예로서 맞이하여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니 왕이 어질게 여기고 그의 큰 아들 홍(泓)은 제씨(諸氏)로 하여 남양군(南陽君)에 봉하고, 둘째 아들 형(瀅)은 갈씨(葛氏)로 하여 낭야군(瑯琊君))에 봉하여 각각 분성(分姓)하게 하였다.   득성조(得姓祖) 남양군 홍(泓)의 9세손 휘(諱) 문유(文儒)는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원(元)나라에서 토번(吐蕃)으로 귀양갈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 1등으로 평장사(平章事)에 오르고 옥대(玉帶)와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구산부원군(龜山府院君 : 구산은 漆原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칠원(漆原)으로 하고 부원군 문유(文儒)를 중조(中祖) 1세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중조 문유의 묘소는 함안군 칠원면 우둔산 자좌(子坐).   중조 6세손 철손(哲孫) 호는 동고(東皐)요 관직은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인데 중종(中宗)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고성(固城)에서 은둔(隱遯)하여 어관포(魚灌圃)선생과 도학(道學)을 강론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뒤에 고성의 거유(巨儒)로서 위패를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봉안하였으며, 유림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분이 입고성(入固城) 선조(先祖)되신다.   사예공(司藝公)의 넷째 손자 낙(洛 : 8세)의 자는 청숙(淸淑), 호는 죽림(竹林)인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배둔역(背屯驛)에서 대파(大破)한 공으로 순릉참봉(順陵叅奉)에 이르렀고,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무 말(沫)도 왜란이 일어나자 형 낙(洛)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웅천(熊川), 김해(金海), 정암(鼎巖) 등지에서 대승, 그 공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그 후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공신록(功臣錄)에 기록되고 호는 가계(柯溪)로 일명 비장군(飛將軍)이라 하였다. 정조(正祖) 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초시(初諡)에 충장(忠壯), 재시(再諡)에 충의(忠毅)를 받았다. 성주 충절사(星州忠節祠)와 고성 운곡서원에 제향(祭享) 되었으며, 조카 홍록(弘祿)과 함께 전사지인 성주와 진주에 각각 쌍충비(雙忠碑)가 섰다.   9세손 홍록(弘祿)의 자는 경행(景行) 호는 고봉(高峯)이며 참판공(叅判公) 호(灝)의 아들이며 조고(祖考)는 조겸(祖謙)이다. 1581년(선조 14) 무과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장으로 숙부(叔父) 말(沫)을 따라 의거하였다. 처음 웅천, 김해, 정암 등지에서 용전하매 그 명성이 이순신(李舜臣)에게 잘 알려져 그 막하에 들어갔으며,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군에게 포위된 진주를 지원하기 위하여 출전하다 도중에서 적을 만나 전사했다. 공신록에 올랐으며, 정조때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추증되었으며, 이 때 정조대왕은 제말(諸沫), 제홍록(諸弘祿) 숙질(叔姪)의 선무(宣武) 전공을 기리기 위해 이조판서(吏曹判書) 서유린(徐有隣)에 명하여 비문을 짓게하고 성주와 진주에 각각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비를 안치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이다. 순조(純祖) 임신년(壬申年.1812)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가증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향리인 고성에 신도비(神道碑)가 서고 공의 숙부 충의공(忠毅公)과 함께 운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이 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의 안위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처했을 때 칠원제씨는 스스로 거의(擧義)하여 왜적과 싸워 전공을 세우고 나라와 겨레를 구한 까닭에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된 1등공신에 제광해(諸光海), 제억보(諸億輔), 2등공신에 제인국(諸仁國), 제여물(諸汝勿), 제응립(諸應立), 제득호(諸得浩), 3등공신에 제수영(諸秀英), 제만호(諸晩浩), 제명인(諸命仁), 제세봉(諸世鳳) 등 무려 22인에 달하였으니 그야말로 심망국활(身亡國活)의 충절이 천추에 빛나는 성씨라 할 것이다.   중조 13세손 경욱(景彧)의 자는 경식(敬植), 시호는 충양(忠襄), 성주목사(星州牧使) 충의공(沫)의 6세손이다.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운총만호(雲寵萬戶), 황해도우후(黃海道虞侯)를 역임,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 이만수(李晩秀)에 의해 청북소모장(淸北召募將)이 되고 군사를 모집, 안주(安州)에 이르러 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 휘하의 병력 2백명을 인솔, 청천강을 건너가서 계속 많은 의병을 모집했다. 정주(定州)에 이르러 의병장 현인복(玄仁福)과 함께 선봉장이 되어 정주성 남문 공격에 용전했고, 이 때 신도진 수군첨절제사(薪島鎭水軍節制使)겸 방어장(防禦將)에 임명되어 계속 적을 공격하다가 적의 복병(伏兵)을 만나 전사했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추증, 정정(定井)의 표절사(表節祠)에 제향되고 철종(哲宗) 때 병조판서(兵曹判書)에 가증되어 칠원제씨의 가문을 빛내었다.   입향조는 14세손 상준(尙峻)이며 호 취헌(翠軒)이다. 1822년(철종 3) 고성에서 입사천(入泗川)하여 정동(正東) 수청(洙淸)에 정착하였다. 묘소는 용현면 신복리(新復里) 덕석골(德席谷) 손좌(巽坐)이다.   입향조 후예들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 17세손 필조(必祚) : 정동우체국장 • 18세손 정렬(廷烈) : 변호사 최만호(崔萬鎬)법률사무소 사무장 • 18세손 정조(廷朝) : 부산미화당백화점 경리과장 • 18세손 정포(廷包) : 부산시 동구 범일동 국제커피? 경영 • 18세손 정헌(廷憲) : 서울 흥국생명 강남영업국 사당영업소장 • 18세손 정출(廷出) : 해태음료(주) 사천공장 근무 • 19세손 태호(泰鎬) : 정도면 부면장 역임, 정동행정대서소 대표 • 19세손 성호(成鎬) : 정동우체국 근무 • 20세손 해진(海震) : 부산 항운노조 중앙부두 분회장 • 20세손 차호(且鎬) : 부산 동래상업고등학교 서무과장 • 21세손 기선(基善) : 포항제철공업주식회사 근무 • 21세손 종태(淙兌) : 부산 태창기업 근무 • 21세손 영모(英模) : 충무중학교 교사 • 22세손 영환(榮煥) : 광양제철소 근무 • 문중 대표는 17세손 필조(必祚: 대곡)이며 종손은 18세손 정문(廷文)으로 고성군 대가면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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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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