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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진주정씨(晋州鄭氏) 지후공후(祗候公后) 수사공파(水使公派) (대산)   정씨(鄭氏)의 관향을 진주로 하는 이른바 <진주팔정(晋州八鄭)의 한 파인 지후공(祗侯公)도 그 가운데 한분이다. 시조(始祖) 휘(諱) 신(侁)은 고려사에 의하면 휘가 선(僐)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인종(仁宗) 때 등과(登科)하여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다가 당시 간신(奸臣)들의 난정(亂政)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 진주시 진성(晋城)에서 은둔(隱遁) 자적(自適)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시조의 8세 순(恂)은 봉상대부(奉常大夫)로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역임했으며, 아들 장차(張次)를 두었는데 큰 아들 9세 중원(中原)은 조선 때 중군섭사직(中軍攝司直)을 지내고 통훈대부광의원정(通訓大夫光依院正)으로 증직되고, 둘째 아들 점(霑)은 통훈대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하양(河陽),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역임하였다. 이로부터 상계(上系)에서 사직공계(司直公系)와 하양공계(河陽公系)로 갈리었다.   그리고 사직공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이 중에 둘째 아들 10세 이인(以仁)은 병절교위사과(秉節校尉司果)를, 셋째의 이의(以義)는 공조참판(工曹叅判)을, 넷째의 이례(以禮)는 수의부위(修義副尉)로서 강계부사(江界府使)를 각각 역임했다. 그래서 이후 후손들은 2자를 사직공 제2자 교위공 이인파(司直公第二子 校尉公 以仁派), 3자를 사직공 제3자 참판공 이의파(司直公 第三子 叅判公 以義派), 4자를 사직공 제4자 부사공 이례파(司直公 第四子 府使公 以禮派)로 각기 호칭하였다.   시조(始祖)의 12세 광윤(光胤 : 자 錫初)은 참판공(以義)의 장손이며, 11세 통덕랑(通德郞) 영(寧)의 아들이다. 공이 훈도(訓導)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터지자 가정을 저버리고 나이 아직 어린 손자 열(悅)을 일깨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닥치는대로 치더니 계사년(癸巳年 : 1593년) 6월, 진주성(晋州城)이 떨어질 때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손자 14세 열(悅 : 자 君學)은 나아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몸을 날려 적진으로 돌진하여 닥치는대로 베고 지르다가 힘이 다하여 적탄(敵彈)을 맞고 그도 장렬히 전사하였다. 뒤에 광윤(光胤)에게는 판관(判官)의 품계를, 열(悅)에게는 부장(部將)이란 품계로 각각 추증하였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책록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광윤공을 판관공파(判官公派)의 파조(派祖)로서 모신다.    • 15세손 지함(之咸 : 자 士應)은 왜란의 병화(兵禍)를 피하여 진주시 금산면에서 거주하였다. • 17세손 세형(世炯)은 1664년(현종 5)생이며, 조향(祖鄕)인 금산면에서 사천으로 이주하여 사남면 화전리 도동에 살았다. 묘는 용현 선진리 구강 신좌(申坐)이다. • 23세손 덕업(德業 : 자 善苦) 할아버지가 약 90년전 사남에서 수청(洙淸)으로 이주 하였다가 그로부터 20년 후 다시 대산(垈山)에 이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24세손 상봉(祥鳳) : 문중대표, 2대 정동면의회 의원 역임, 대산리장 역임, 동화약방 경영 • 24세손 춘봉(春鳳) : 국무원 사무처 연금과 차석 역임 • 25세손 종신(鍾晨) : 마산양덕중학교 교사 • 25세손 종경(鐘景) : 진주 영수당한약방 대표 • 26세손 영갑(永甲) : 거제 대우중공업 근무, 종손(宗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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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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