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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진주정씨(晋州鄭氏) 청천군파(菁川君派), 충장공파(忠壯公派) (감곡)   진주팔정(晋州八鄭)의 한 파인 영절공(英節公) 예(藝)를 시조로 하고, 문익공(文翼公) 시양(時陽) 중조 1세로 계대하고 있다. 시조 예(藝)는 고려 태조의 창업을 도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서 광록대부(光祿大夫)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고, 중조 1세의 아들인 유(裕 : 호 學堂, 시호 文簡)는 고려에서 좌시중(左侍中)을 역임하였다. 그의 후손은 문충(文忠 : 守均, 일명 均), 영밀(英密 : 洪旦), 충무(忠務 : 安社), 문영(文英 : 需), 문양(文良 : 乙輔) 등 역대로 내리 연시호(連諡號)를 받아 공훈(功勳)과 덕업(德業)이 모두 고려사를 빛냈다.   조선에 들어서도 유(裕)의 12세손인 이오(以吾 : 자 粹可, 호 愚   谷)는 태종 때 명신(名臣)으로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어 지공거(知貢擧)를 겸했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인데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문정공(以吾)의 넷 아들 중 맏아들 분(笨 : 14세)의 자는 자외(子외)요,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며, 시호는 충장(忠莊)으로서 충장공파(忠莊公派)의 파조시다.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이렇듯 세종과 문종조에 걸쳐 조종의 중신(重臣)으로 많응 치적(治績)을 남겼고, 문종이 죽을 때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어린 단종(端宗)의 보호를 유탁(遺託) 받았다. 1453년 (단종 1) 전라, 충청, 경상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충주로 향하던 중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의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역신(逆臣)에 몰려 낙안(樂安 : 현 승주군의 속면)에 안치되어 사사(賜死) 당했다.   일설에 의하면 공은 귀양지에서 늘 조상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제사를 지냈는데, 하루저녁에는 자라가 일어나서 수행하는 종에게 밥을 짓게하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후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조금 뒤에 한양으로부터 내려온 감형관(監刑官)에게 사약을 받았다고 한다. 뒤에 신원(伸寃)되고 묘소는 진주시 상대동에 소재하며, 장흥(長興)의 충렬사(忠烈祠)와 진주 세덕사(世德祠)에 제향(祭享)되었다.   파조(派祖)의 15세손(世孫) 상준(相俊)이 150여 년전(현종 : 40)에 고성(固城) 부련(芙連)에서 감곡(甘谷)으로 입주(入住)하였는데 현재 6대(代)에 이르며 손세(孫勢)는 30호가 된다. 감곡 거주는 5호이고, 그 외는 부산(釜山), 진주(晋州)에 주로 살고 있다.   종손(宗孫)은 21세손 광효(鑛孝)이며, 문중 대표는 감곡 이장을 역임한 19세손 호갑(好甲). • 20세손 기조(基祚) : 인천초등학교 교감 • 20세손 현식(鉉植) : 이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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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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