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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진주정씨(晋州鄭氏)의 본관(本貫)과 파(波)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본고장인 진주에서 강씨(姜氏), 하씨(河氏)와 더불어 삼대토성(三大土姓)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진주정씨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여러 계통이 있다.   <조성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진주정씨는 19파가 나와 있으며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5파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진주정씨의 본 고장인 진주에서는 정확한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는 <진주팔정(晋州八鄭)>이란 말이 상식화되어 있어 대부분의 문헌에 8파로 기록하고 있다.   진주정씨는 전모(全貌)를 파악할 수 있는 문헌이 없이 계대(繼代)를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으며, 현존하는 진주정씨의 대부분이 영절공(英節公) 예(藝), 호장공(戶長公) 자우(子友), 중추원사공(中樞院事公) 장(莊),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헌(櫶) 등의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므로 크게 4파로 분류한다.   이들 4파를 계통별(系統別)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예계(藝系)> : 시조 영절공 예(藝)는 고려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라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문익공(文翼公)시양(時陽)을 기1세조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그리고 유(裕)의 6세손 수(需) 또는 그 아들 수규(守珪)를 중조(中祖)로 하는 파도 있다. 시양(時陽)의 12세손인 신중(臣重)은 찬성자(贊成事)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이오(以吾 : 文定公)는 조선 태종 때 명신(名臣)으로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찬성사를 역임했다.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분(笨)이 단종(端宗) 때 상신(上臣)으로 유명하다.      <자우계(子友系)> : 시조 호장공 자우(子友)는 고려조에서 호장(戶長)을 지냈다. 그의 6세손 신렬(臣烈)은 고려 현종(顯宗) 때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친 후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올라 글안(契丹)의 침입을 격퇴시킨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신렬(臣烈)을 중조로하는 일파(一派)가 있다. 그리고 자우(子友)의 8세손 진경(晋卿)은 중랑장(中郞將)을, 또 첨정(僉正)을 지낸 7세손 중공(仲恭 : 호 松軒)을 중조로하는 파도 있다. 진경(晋卿)의 4세손 천익(天益)은 공민왕 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내다가 당시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에서 물러나서 향리(鄕里)로 내려가 퇴헌정(退軒亭)을 짓고 자적(自適)하다가 사위인 문익점(文益漸)이 원(元)나라에서 귀국길에 목화씨를 가져 왔으므로 이를 시배(始培)하여 <물레>와 <씨아>를 창안(創案)하여 유명하다.      <장계(莊系)> : 시조 주충원사공 장(莊)은 고려 말기에 통정첨지(通政僉知)를 지냈으며, 그의 4세손 척(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判尹)을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공대공파(恭戴公派)가 있다. 조선 태종 14년(14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척(陟)은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子)를 거쳐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와 감찰(監察)을 지내고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으며, 세조 9년(1463)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했다. 척(陟)의 아들 성근(誠謹)은 성종 5년(1474)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전적(田籍), 지평(持平)을 지냈고,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승지(承旨), 직제학(直提學)을 역임 하였다. 그는 성종이 세상을 뜨자 연산군의 <단상법(短喪法)> 시행에도 불구하고 홀로 3년상을 치렀다가 국법을 어겼다 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처형당했다.      <헌계(櫶系)> : 시조 헌(櫶)은 고려 말기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장손은 온(溫)이요, 차손 택(澤)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일파가 있다. 고려말 창왕(昌王)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온(溫)은 눈뜬 장님을 가장하고 지리산 청학동(靑鶴洞)에 숨어 살았는데 조선이 개국된 후 태조가 수차레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고 절개(節介)를 지켰다. 온(溫)의 동생 택(澤)은 고려 말 감찰어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10세손 경세(經世)는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學統)을 계승하여 주자학(朱子學)의 거두(巨頭)로서 이조판서(吏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고, 성리학자(性理學者)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우리나라 예학(禮學)의 금자탑을 세웠다.   이 외에 자우계(子友系)의 7세손 중공(仲恭)은 고려 때 첨정(僉正)을 역임했으며, 그의 15세손 기룡(起龍)이 1586년(선조 19) 무과에 급제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에 올랐던 그는 거창(居昌)과 금산(錦山) 싸움에서 무공을 세웠고, 곤양수성장(昆陽守城將)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했다. 이어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상주성(尙州城)을 탈환한 후 이어 1593년 회령부사(會寧府使), 이듬해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승진되었다. 그후에 이어 성주, 합천, 초계, 의령, 고령 등지의 성을 탈환하는데 무명(武名)을 떨쳤으며,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통영(統營)의 진중(陣中)에서 일생을 마쳤다. 문헌에는 곤양정씨(昆陽鄭氏)의 시조(始祖)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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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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