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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영일정씨(迎日鄭氏) 문충공후(文忠公后) 도암파(道菴派) (학촌, 객방)   영일정씨는 연원(淵源)은 같으면서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는 두 파가 있는데 그 하나는 고려 예종(睿宗) 때의 중신으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 : 호 東河, 시호 滎陽)을 시조(始祖)로 하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로 이어지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가 있으며, 감무(監務)를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1세조로 하는 문정공(文貞公) 정사도(鄭思道), 송강(松江) 정철(鄭澈)로 이어지는 감무공파(監務公派)로 갈라져 있는데, 이 양파는 동원(同源)이면서도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계촌을 따지지 못하여 따로이 보사(譜事)를 하고 있다.   시조(始祖) 습명(襲明)을 1세로 하여 11세손인 몽주(夢周 : 자 達可, 호 圃隱, 시호 文忠, 관직 大提學)는 경북 영천(永川) 출신으로서 문충공파(文忠公派)의 파조(派祖)이시다.   고려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가는 왕조를 위해 목숨을 던진 역사상 대표적인 충신이며, 또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조(宗祖)로도 추앙되었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장원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공양 왕조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하고 왜구의 침입을 막아냈으며, 특히 사신으로 왜국 구주(九州)의 지방장관 이마가와(今川了俊)에게 가서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락을 얻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민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안으로는 개경(開京)에 오부학당(五部學堂)과 지방에 향교(鄕校)를 세워 교육을 진흥시키는 한편 지방관들의 비행을 시정하고 의창(義倉)을 설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등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당시 이성계(李成桂)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가서 신진 개혁세력의 혁명야욕에 항거, 고려를 끝까지 지탱하려다가 방원(芳遠 : 太宗)의 문객(門客)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선죽교(善竹橋)에서 격살(擊殺)되었다. 그의 죽음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속에서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충절의 표상으로 남아 명문 영일정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뒤에 조선조의 태종은 포은(圃隱)의 관직을 복구시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는 한편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됨을 비롯하여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에서 제향을 모시고 있다. 저서에 <포은집(圃隱集)>이 전한다.   문충공(文忠公)의 큰아들 12세 종성(宗誠)은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조참의(吏曹叅議)를 지냈고, 손자 13세 보(保 : 호 雪谷)는 진사로서 학문에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친교가 있었고, 벼슬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일어나자, 그들의 무죄를 주장한 말이 세조에게 알려져 처형의 명이 내렸으나, 정몽주의 자손임이 밝혀져 연일(延日)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단성(丹城)으로 이배(移配)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숙종 때 이조참의(吏曹叅議)에 특증되었고, 영조 때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에 가증(加贈)되었다.   문충공의 둘째 아들 12세 종본(宗本)은 문과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역임하고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叅議)에 증직되었으며, 장자 13세 순(恂)은 생원으로서 계공랑 의영고 직장(啓功郞義盈庫直長), 차자 관(慣)은 사과(司果)를, 3자 신(愼)은 오위(五衛)의 사정(司正)을 지냈는데, 이로써 순자파(恂字派), 관자파(慣字派), 신자파(愼字派)의 3파로 갈리는데 여기서 신자파가 즉 도암파(道菴派)이다.   문충공(夢周)의 증손인 14세 지충(知忠)은 사정공 신(愼)의 계자로서 생부는 직장(直長)을 지낸 순(恂)이며, 자는 덕원(德源)이요 호는 도암(道菴)이다. 벼슬은 충순위(忠順衛)로서 세조 때 당숙(堂叔)인 참의공(參議公) 보(保)가 앞서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단성(丹城 : 현 산청군의 속면)으로 유배되자, 양친과 생모인 양성이씨(陽城李氏)를 모시고 남하, 당숙이 귀양살이 하는 적소(謫所)와 가까운 진주에 이거(移居)하였다. 그리하여 지충가(智忠家)는 전조(前朝)의 충신 문충공의 후예라 하여 1486년(성종 17) 10월, 장충문(獎忠文)과 함께 완복서(完復書)의 은전(恩典)이 내리고, 이로써 복호손(復戶孫)이 되었다. 대광보국 승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우의정(右議政)에 증직되었다.   공은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 가운데 셋째의 15세손 숙(淑)이 사과(司果) 벼슬을 지낸 후 진주시 문산면에 이주하여 살았다. 아들 광소(光韶)는 효행으로 이름나 참봉으로 제수 받았고, 17세손 성구(誠龜)는 첨지(僉知), 아들 18세는 계원(繼元 : 僉知), 찬원(纘元)이며, 이들 두 형제분에게 1613년 광해조로부터 ‘충신의 후예는 완복(完復)함이 마땅하다.’는 내용의 완복서가 또다시 내렸다. (실은 세 번째)   입향조는 21세손 흔(焮)할아버지이며, 첨지공 계원(繼元)의 증손이다. 이분께서 진주 문산에 살다가 지금부터 3백수십년 전에 입사천(入泗川), 정동 고읍리에 이거 정착하니 입향조가 되었다. 이후 자손들은 만마(萬馬) 어영동에서 4대를 살다가 다시 학촌, 객방 등지로 나아가 세거하였고, 자손이 번성하여 충신의 후예임을 긍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향조의 산소는 화암리의 소류지(못) 윗편 임좌(壬坐)에 있다.   입향조 후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 29세손 우영(宇永) : 치안본부, 청와대사정반, 민정반 역임(경정) • 29세손 덕영(德永) : 새마을지도자 사천읍협의회회장, 행정대서소 운영 • 30세손 선화(善和) : 농협중앙회 사천시지부장 역임 • 30세손 갑정(甲正) : 고성 영오초등학교 교감 • 31세손 연오(然五) : 보명 연숙(然淑), 정동농협 감사, 사천향교 장의 역임, 사천유도회 회장 • 31세손 연도(然道) : 정동초등학교 교장 역임, 국민훈장 동백장 서훈 • 31세손 연재(然載) : 주식회사 녹십자사 영업과장 • 31세손 연진(然珍) : 서울 정연진치과의원 원장 • 31세손 연권(然權) : 한국도로공사 건설현장 감독 • 32세손 기운(基云) : 보명 원교(元敎), 정도면의회 3대의원 역임, 정동 노인회 회장 역임 • 32세손 운교(云敎) : 서울고등학교 교사 • 32세손 원교(沅敎) : 국민일보 경제부 차장 • 33세손 의도(義道) : 일명 성도(成道), 부산 운수업조합 대표 • 33세손 의성(義成) : 일명 성우(成宇), 현역 육군 중령 • 문중 대표 32세손 문교(文敎 : 호 松亭) • 종손 33세손 의태(義台) :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여 현재 경기도 고양에서 양어장 경영 ※ 수복사적(受復事蹟)   이른 바 복호자손(復戶子孫)이라는 말이 있는데, 복(復)은 면제한다는 뜻이고 호(戶)는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복호는 그 대상자에 따라 국가가 호(戶)에 부과하는 요역의 부담을 감면(減免)하는 것으로, 왕족(王族), 장권(獎勸), 진휼(賑恤), 특수한 사람, 군호(軍戶), 정역(定役)의 6종류로 구분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영년복호(永年復戶)와 한년복호(限年復戶)가 있었다.   그러니까 영일 문충공(文忠公)의 후손(奉祀孫)에게 내린 수차례의 완복서는 위 장권류(獎勸類)에 해당되며 한년복호임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조선시대의 어느 통제사(統制使)가 역로(驛路)를 통영(統營)으로 부임해 가는데 만마 앞길을 지날 때 문충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말에서 내려 문안(問安)을 하고 갔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참고로 여러 완복서 가운데 문충공의 7대손 계원(繼元), 찬원(纘元) 형제에게 내린 경상도 관찰사의 완복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관찰사 겸 순찰사가 완복사를 한다. 충신의 후예는 이치가 완복함이 마땅하니 무릇 잡역 따위는 일체를 덜어주고, 만일에 침노를 당하거든 관아에 고하여 죄를 다스리게끔 꼭 알려야 한다는 통첩을 문충공 7대손 정계원과 정찬원에게 내리니 이를 따라 할 것이다.   1613년(광해군 5) 3월 24일      (觀察使兼巡察使爲完復事忠臣後裔理宣完復凡千雜役一切蠲除如有被侵告官治罪事   合下仰照驗施行項至帖者 右帖下文忠公七代孫鄭繼元鄭纘元准此萬曆四十一年三月二十四日   慶尙道觀察使嘉善大夫兵馬水軍節度使兼巡察使 吉川郡 權昐)>      위 여러 완복서의 원문은 현재 문중 대표인 32세손 문교(文敎)가 소장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수복사적으로는 선조(先祖)의 봉사 제수비(祭需費)조로 매년 정조(正粗) 3섬7말5되씩을 32세손 재교(載敎)의 증조부인 29세대까지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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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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