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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경주정씨(慶州鄭氏) 문헌공후(文獻公后) 노송정공파(老松亭公派) (동계 1)   시조(始祖)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 : 서라벌)의 6촌 중 취산(觜山) 진지촌장(珍支村長 : 본피부) 지백호(智伯虎)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그는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 봄에 유리왕(儒理王)이 6부(部)를 개정하고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賜姓)할 때 정씨(鄭氏)의 성(性)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그의 42세손 진후(珍厚 : 시호는 文正)가 나라에 공을 세워 월성군(月城君 : 월성은 경주의 고호)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경주정씨 파계는 득관 중조 진후(珍厚)의 5세손인 현영(玄英 : 중조의 46세손)이 문헌공파(文獻公派)의 파조이며, 진후(珍厚)의 8세손인 희계(熙啓)는 양경공파조(良景公派祖)이고, 진후(珍厚)의 3세손인 이기(頤奇)는 월성위공파(月城尉公派)의 파조시다. 그리고 시조의 42세손인 필(弼)은 평장공파조(平章公派祖)로 이루어졌다.   이 중에 문헌공파(文獻公派)의 파조 현영(玄英 : 호 秋江 시호 문헌)은 고려 때 문하시랑(門下侍郞), 호부상서(戶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둘째 아들 종보(宗輔.47세)는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시조의 48세손 인검(仁儉)은 47세손 종보(宗輔)의 넷째 아들로서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좌사간(司諫院左司諫)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증직되고, 아들 49세손 염(廉)은 생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무안(務安)에서 교도(敎導)로 유학(儒學)을 가르쳤다. 그리고 손자 50세손 지년(知年)의 자 유영(有永), 호는 노송정(老松亭)으로 1438년(세종 20) 문과에 급제한 후 중훈대부(中訓大夫) 성균관 사예(成均館 司藝)를 거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간 이후 노송정공파(老松亭公派)의 분파조(分派祖)가 되었다.   51세손 효본(孝本 : 자 可允)은 노송정공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460년(세조 6) 문과에 급제하여 예안(禮安 : 현 안동군의 속면) 현감(縣監)을 지내고 성종 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아들 52세손 광선(光先)은 성종조에 진사로 제능참봉(齊陵叅奉)하고, 손자 53세손 구(球 : 호 竹沙)는 어려서부터 재기(才器)가 뛰어나 일찍이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선생의 문인으로서 경사(經史)에 밝고 시문(詩文)이 고명(高明)하였다.   58세손 득승(得承 : 起祥)은 통덕랑(通德郞) 57세 천교(天僑)의 장자로 선조 때 효능 참봉(孝陵叅奉)으로 있다가 전라도 순창(淳昌)에서 아우 득명(得命)과 헤어져 멀리 경상도의 통영(統營)으로 이거(移居)하였고, 그후 후손들은 거제(巨濟), 한산도(閑山島) 등지에서 대대로 가계를 이었다.   입향조는 시조의 64세손 재복(在福)이며, 거제군 한산면(閑山面)에서 배편으로 입사천(入泗川)하여 지금의 삼천포(당시는 사천의 삼천리면)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그러다가 아들 65세손 남주(南柱)가 고종 때 상서면(上西面 : 현 사남면) 월성(月城)으로 이주하였고, 3대 독자인 그의 아들 66세손 영재(永載 : 자 守完) 할아버지가 다시 정동 동계(東溪)로 이거(移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향조의 묘소는 삼천포 각산등(角山嶝) 건좌(乾坐).   문중 대표 68세손 권섭(權燮)은 동계 새마을지도자를 역임하였고, 종손은 69세손 규철(圭哲)이다. • 68세손 옥섭(玉燮) : 강원도 홍천군청 통신과장 • 68세손 연섭(連燮) : 정동농협 서부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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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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