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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성주이씨(星州李氏) 문렬공후(文烈公后) 경무공파(景武公派) (반룡)   시조(始祖)는 신라말의 재상(宰相) 휘 순유(純由)이다. 그는 아우 돈유(敦由)와 같이 신라에서 벼슬을 하며 재상(宰相 : 관원을 지휘 감독하는 2품 이상의 벼슬)의 자리에 올랐으나 신라가 망하자 이름을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경산(京山 : 성주의 옛이름)에 은둔(隱遁), 절개를 지키며 고려조에 불복하였다. 그래서 고려 태조의 미움을 받게 되어 그곳 호장(戶長)으로 강등되어 자손 대대로 호장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성주이씨가 실질적인 시조(始祖)로 받드는 분은 시조 순유(純)由의 12세 손 휘 장경(長庚)이다. 그는 안일호장(安逸戶長)으로 덕망이 높았으며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왕조에 공을 세움으로 해서 그에게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에 추증되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또 그의 손자 승경(承慶)이 원나라에 벼슬하면서 공을 세운 추영(追榮)으로 원제(元帝)가 선칙(宣勅)하여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장경(長庚)을 중흥(中興)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본관(本貫)은 중흥조가 농서군공에 추봉되었기 때문에 농서이씨(隴西李氏)라고도 하며,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기 시작한 당시(충렬왕 이후)의 지명이 성주목(星州牧)이었기 때문에 성주이씨(星州李氏)라고 한다. 중흥조의 묘소는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화동 능곡(陵谷)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향사하고 있다.   성주이씨의 파계는 중흥 1세조 장경(長庚)의 아들 5형제 대(代)에서 크게 다섯 계통으로 갈리어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명문(名門)의 지위를 지켜왔는데, 이를 계통별로 살펴보면 첫째 아들 백년(百年)을 파조로 하는 밀직공파(密直公派)와 천년(千年)을 파조로 한 참지공파(參知公派), 만년(萬年)을 파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 억년(億年)을 파조로 하는 유수공파(留守公派), 조년(兆年)을 파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로 나뉘어졌다.   문열공파의 파조 조년(兆年 : 시조 13세)은 1269년(원종 10)에 태어나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 백화헌(白花軒), 시호는 문열(文烈), 1285년(충렬왕 11) 진사로 문과에 급제,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지합주사(知陜州事 현 협천), 비서랑(秘書郞)을 지냈으며, 고향에 은거중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서 왕위(王位)의 찬탈을 음모하자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그 부당함을 상소했다.   충축왕이 귀국하자 감찰(鑑察), 장령(掌令)을 발탁하고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관동지방(關東地方)에 가서 백성을 안무(按撫)하고 많은 치적을 쌓았다. 이어 군부(軍簿) 판서(判書)에 승진, 그 후 여러 차례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에 내왕했고,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예문과 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2) 왕의 황음(荒淫)을 간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사직, 뒤에 성근익찬경절공신(誠謹翊贊勁節功臣)이 되어 벽상(壁上)에 원형(圓形)되었다.   문열공의 증손 제(濟 : 시조 16세)의 자는 자안(子安), 시호는 경무(景武)로서 경원공(敬元公 : 褒 시조 14세)의 여섯 아들 중 넷째 아들 성산군(星山君) 인립(仁立 : 시조 15세)의 맏아들이다. 그는 이성계(李成桂)의 셋째 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결혼하였으며, 1392년 조선건국(朝鮮建國) 때에 이성계를 도와 공을 세워 순충좌명 개국공신(純忠佐命開國功臣) 1등으로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지고 의흥친군위절도사(義興親軍衛節度使) 겸 지서경연사(知書經筵事)가 되었으며, 1402년(태종 2)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에 올랐다. 후에 문열공파(文烈公派)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면서 경무공파(景武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입향조 18세손 귀범(貴範 : 시조 19세)은 경무공(濟)의 13대손으로 1874년(고종 11) 갑술년(甲戌年)에 고성 영현(永縣)에서 입사천, 정동 운곡(雲谷)에 터전을 잡고 가계를 이었다. 묘소는 고성 대가면 갈천리 마장골에 있다. 문중 대표는 21세손 준상(俊相)이며 반룡이장을 지냈고, 종손은 22세손 창훈(昌勳)으로 부산(釜山)에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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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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