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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사천(동성)이씨(<泗川(東城)李氏> 참의공파(叅議公派) (여옥)   시조(軾)의 11세손 휘 윤(綸)은 교도공(敎道公) 자(자)의 5대손으로 장파 구주(九疇)의 현손(玄孫).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문행(文行)이 높았다. 1526년(중종 21)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참의(禮曹叅議)에 이르렀고, 사천이씨(泗川李氏) 참의공파(叅議公派)의 파조이시다. 퇴관(退官)하여 향리로 돌아와 초야에 있을 때, 여러 차례 명종(明宗)의 부름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더 나아가지 않았으며, 서당(書堂)을 세워 이구암(李龜岩) 선생과 더불어 오로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묘소는 양위분 함께 정동 화암리의 여옥(如玉)마을 구백호등(口白虎嶝)에 있다.   12세손 용안(龍安)은 훈련첨정(訓練僉正)을, 13세손 희복(希福 : 자 憲必)은 부호군(副護軍)으로 임진란 때 세운 공으로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에 오르고, 14세손 이남(以南 : 자 極壽)은 무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증직되고, 15세손 철인(哲仁 : 자 浩然)은 충의위(忠義衛) 겸 보공장군(保功將軍), 18세손 덕무(德茂)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으니, 파조 이후의 자손들은 5대가 서반(西班) 무산계(武散階)로서 계대(繼代)하였다.   19세손 지한(之漢)은 파조 윤(綸)의 8대손이며 효자 18세손 덕무(德茂)의 아들로서 자는 명원(明遠)이요, 호는 서벽재(棲碧齋). 어려서부터 글을 배움에 뛰어남이 있었고 문장(文章)을 짓는데로 진실함을 중히 여겨 학문을 성취하였다. 생전에 계가서(戒家書)를 썼는데, 가정을 다스리는데 있어 조심하고 삼가할 일과 부모를 공경하고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절차와 부부가 거실(居室)하는 도리와 자식을 가르치는 법, 심지어 농사(農事)짓는 일에 이르기까지 살피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효(孝)를 으뜸으로 행실(行實)하고, 근검(勤儉)을 본으로 삼아 예의(禮儀)와 범절(凡節)을 숭상할 것을 가훈(家訓)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공의 지극한 효도는 신인(神人)이 감복하리 만큼 이적(異蹟)으로 일어난 호감고사(虎感古事)가 있으며, 포현문(褒顯文)을 엮은 효감록(孝感錄)은 공의 아들 양건(陽健), 손자 채식(采植)에 이르기까지 3대의 효행사적(孝行事蹟)을 수록한 실록으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후 참의공파의 후예들은 파조로부터 10대까지 정동 여옥(如玉)마을에 세거(世居)해 왔으나 그 후손들은 모두 연고지를 떠나 지금은 진주 수곡(水谷)과 대평(大平), 산청의 단성(丹城), 하동의 옥종(玉宗), 북천(北川), 양보(良甫) 그리고 진주 등지에서 산거(散居)하여 종인(宗人)은 2대계 12소문준의 자손들이 세연(世緣)을 폐고 근실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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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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