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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파평윤씨(坡平尹氏) 원평군후(原平君后) 수찬공<효빙>파(修撰公<孝聘>派) (여옥)   시조의 후 신달(莘達)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으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곁에서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忠諫) 했으며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벽상삼한익찬이등공신(壁上三韓翊贊二等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직을 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파평(坡平 : 현 경기도 파주군)으로 삼아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그 후 시조의 현손인 5세손 관(瓘 : 자 同玄, 시호 文肅)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랑중(左司郞中)을 지내고, 예종 2년(1107) 여진정벌(女眞征伐)에 원수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東北界)에 출전, 함주(咸州)와 영주(英州) 등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개선했으며, 뒤에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병부사 상주국감수국사(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시조의 15세손 향(向 : 시호 昭度)은 문하평리(門下評理) 승순(承順 : 시조의 14세)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 우왕 때 생원으로 사예(司藝) 류백순(柳伯淳), 생원 박초(朴礎) 등과 함께 상소하여 불교 때문에 나라가 망하므로 정도전(鄭道傳) 등 유학자들을 종중하여 유학(儒學)을 권장하라고 주장했다.   조선 태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경차관(忠淸道敬差官)이 되어 왜구에게 미곡 운반선을 탈취당한 충청도 안문도절제사(忠淸道安問都節制使) 최 이(崔迤) 등 지방관 4명을 처벌했다. 1415년(태종 15)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재직중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당시에 공을 세운 장수들이 공신록권(功臣錄卷)을 재정하라고 상소했다가 파직당하고, 전리(田理)에 방귀(放歸). 이어 횡성(橫城)에 안치되었다. 1417년 풀려나와 강원도 관찰사(江原道 觀察使)가 되고,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에 평양에서 객사했다.   시조의 18세손 효빙(孝聘 : 자 聘之)은 1469년(예종 1)에 낫으며 소도공 향(向)의 증손이다. 1496년(연산군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으뜸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지냈다. 1506년(중종 1)에는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여 지제교(知製敎 : 국왕이 내리는 교서의 글 짓는 일을 맡은 자)가 되고, 1510년(중종 5)에는 안음현감(安陰縣監 : 지금의 함양군의 속면)으로 나갔다가 1513년에는 삼배(三拜)로서 수찬 지제교 겸 경연관(經筵官), 춘추관 기산관(春秋館記事官)을 역임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시에 능했으며, 수찬공파(修撰公派)의 파조시다. 아들 19세손 선(宣 : 자 可述) 승사랑 참봉(承仕郞叅奉)하고, 둘째 아들 영(寧)은 진사로서 문장이 빛나 진양지(晋陽誌)에 이름이 실렸다.   시조의 20세손 사복(思復)은 참봉공 선(宣)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에 들어갔다가 계사년(癸巳年 :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뒤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진주 창렬사(彰烈祠)에 제향되었다. 그리고 아들 21세손 혜(惠) 통덕랑(通德郞)도 아버지 첨정공과 함게 같은 날 진주성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로써 세칭 일문에서 쌍충(雙忠)이 났다고 추앙되었다.   시조의 25세손 광선(光宣 : 자 逸明, 호 慕軒)은 성균진사(成均進士)로서 인조 때 청산현감(靑山縣監 : 현 충북 옥천군의 속면)을 지내다가 사직, 고향으로 내려와 노부모를 모셨는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시조의 31세손 택필(宅弼)이 선향(先鄕)인 진양군 금곡면에서 고성군 영오면 오서리로 이거하였고, 아들 32세손 진황(鎭璜 : 초휘는 致一, 자는 克五) 할아버지께서는 철종 때 정동으로 들어와 지금의 여옥 마을에 정착하니 이분이 입향조시다. 산소는 도덕산 묘좌.   문중 대표는 35대손 명진(明鎭 : 일명 榮海)이며, 종손은 36세손으로 기한(基漢)이고 부산에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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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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