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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무송윤씨(茂松尹氏)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대곡, 객방)   시조 휘 양비(良庇)는 고려 예종(睿宗) 때 보승낭장(保勝郎將)을 지냈다. 공은 원래 무송현(茂松縣)의 현리(縣吏)로, 현리로서는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 보승낭장을 지냈다. 시조의 선대는 중국의 오계시대(五季時代)에 난을 피해 우리나라로 건너와 하남도 무송현(河南道茂松縣 : 지금의 전북 고창군)에 정착한 윤경(尹鏡)이라고 하나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昭穆)을 밝히지 못하고 계대가 가능한 양비(良庇)를 시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무송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고창군 대산면 성남리에 있으며 음력 3월 15일 향사(享祀)하고 있다.   무송윤씨의 파계는 시조 양비의 아들 해(諧), 의(誼) 형제대에서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와 장령(掌令)공파로 대별되는데, 큰 아들 해의 후손인 대사성공파에 많은 인물이 나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시조의 6세손 회종(會宗)은 문정공(文貞公) 택(澤)의 손자로 고려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낸 구생(龜生)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사재부령(司宰副令)이 되어 1390년(공양왕 2) 세자시학(世子侍學)을 겸직했다. 앞서 우왕, 창왕의 주살(誅殺)을 요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형조총랑(刑曹摠郞)으로 전직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을 도왔으나, 1395년(태조 4) 의랑(議郞)으로서 급전(給田)을 잘못하여 외지(外地)로 유배되었다. 1407년(태종 7)에 사예로서 문과중시에 급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이 되고, 1414년 사간원(司諫院) 우사간(右司諫), 도감사(都監使)를 지냈다. 대사성공파의 파조(派祖)이며, 묘소는 김포군 고촌면 풍곡리 갑좌(甲坐)에 소재하고 있다.   아들 7세손 강(江)은 조선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호군(大護軍)에 이르고 남하(南下)하여 지금의 산청군 단성(丹城)에 시거하였다. 그의 아들 8세손 변(汴)은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직(司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으나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단성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조의 14세손 경락(景洛 : 호 雲岩)은 송오공(松塢公) 언홍(彦洪 : 시조의 11세)의 증손이며 조고(祖考)는 창녕현감(昌寧縣監)을 역임한 동(동)이고, 부조(父祖)는 지재공 사숙(止齋公 嗣淑)이다. 비관(卑官)인 참봉(叅奉)을 거쳐 군기시봉사(軍器寺奉事)를 지냈으며, 아들 욱(旭 : 宣務郞), 민(旻), 승(昇), 위(暐), 시(時), 흔(昕), 명(明) 등 7형제를 두었다. 이 중에 셋째 아들 승(昇 : 15세손)의 호는 농재(農齋)로서 1597년(선조 30)출생, 남명 조식(南冥曺植)의 사숙(私淑)인 덕천원생(德川院生)이며 성품이 비범(非凡)하여 경사(經史)에 밝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일향(一鄕)에서 창의(倡義), 의장(義將)이 되어 조령(鳥嶺)을 넘다가 강화(講和)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와 토적(討賊)치 못함을 늘 한(恨)으로 삼다가 여생을 마쳤다.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에 증직 되었다.   이후 15세손 욱(旭)의 아들 계무(繼茂), 승(昇)의 아들 형무(亨茂 : 生父 時의 맏아들), 시(時)의 아들 재무(再茂), 흔(昕)의 아들 흥무(興茂) 등 16세대에 와서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단성(丹城), 사천파(泗川派)라 호칭되었다.   사천에 처음으로 입향한 분은 병절교위(秉節校尉) 재무(再茂)의 아들인 17세손 응상(應商)으로 호는 청허당(淸虛堂)이며 시(時)의 손자이다. 산청 단성에서 사천으로 들어와 정동 감곡에 정착하였다. 이어 형무의 아들 18세손 대갑(大甲)이 젊은 나이에 일찍이 타계하자 그의 처 수원백씨(水原白氏)가 아들 19세손 광복(光復), 광채(光采) 형제를 데리고 삼종숙(三從叔) 응상이 사는 정동으로 이주하여 대곡 신기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계무(繼茂)의 7세손인 익순(益淳 : 자 益瑞, 22세손)은 여러 친척들의 뒤를 이어 정동 대곡(大谷)으로 이주 정착하였다. 응상의 묘는 감곡 수리곡 갑좌(甲坐)이고, 광복, 광채의 산소는 수청 뒤 이구산 아래 각각 곤좌(坤坐)와 건좌(乾坐)이며, 익순의 묘소는 장산촌(獐山村) 뒤 해좌(亥坐)이다.   20세손 수권(守權)의 자는 자곤(子坤)이요 호는 독지헌(篤志軒)이니 1782년(정조 6) 광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광채(光采)의 계자가 되었다. 역대왕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대 까지 93수(壽)의 장수를 누렸으니 보기드문 일로서, 90세 때인 고종 신미년(1871)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은자(恩資)가 내렸다. 묘소는 객방 뒤 봉대산 남록(南麓) 간좌(艮坐)이다.   문중 대표는 대곡 계무계(繼茂系)의 후손인 25세손 세홍(世洪)이며, 종손은 26세손 구선(求善). 그리고 형무계(亨茂系)의 후손인 종손은 27세손 태환(泰晥), 재무계<再茂系(泗川派>의 종손은 27세손 영철(暎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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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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