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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영산.영월신씨(靈山.寧越辛氏)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반룡)   시조(始祖) 휘 경(鏡 : 호 巖谷)은 본래 중국(中國) 송(宋)나라 사람으로 고려 인종(仁宗 : 1123~1146) 때 송나라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시호는 정의(貞懿)이시다. 시조의 선대는 당(唐)나라 사람으로 현종(玄宗) 천보(天宝) 연간, 즉 신라 경덕왕(景德王 742~764)에 귀화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문헌의 실전으로 소목(昭穆)을 계대할 수 없고 그후 공이 다시 와서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신씨의 본관은 영산(靈山 : 현 창녕군 지역), 영월(寧越) 2본이지만 모두 같은 혈족으로서 영산신씨가 큰집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조 이후의 파계는 8대손을 전후하여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덕재공파(德齋公派), 초당공파(草堂公派), 부원군파(府院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의 5파로 대별되는데, 앞의 3파는 영산신씨이고 뒤의 2파는 영월신씨로 분관되었다.   위 영산신씨 3파 가운데 상장군공파의 파조는 시조 정의공(貞懿公)의 현손인 주계(周繼 : 5세손)로서 영원부원군(靈元府院君) 몽삼(夢森)의 넷째 아들이며, 고려 고종 1년(1214)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아상장군(正衙上將軍, 一云判書)에 이르러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의 파조(派祖)이시다. 상장군공파에서는 중정대부(中正大夫) 9세손 성렬(成烈)의 손자 11세손 사천(斯蕆)이 고려말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곡강(曲江)으로 낙향하여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후손들이 후대로 내려 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分派)되었다.   시조의 18세손 압(압)은 용궁현감(龍宮縣監)과 성주목사(星州牧使) 겸 판관(判官)을 지낸 17세손 희수(希壽)의 7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재종숙(再從叔)인 원(琬 : 17세)에게 출계(出系)한 충장공(忠壯公) 초(礎)의 아우이다. 타고난 바탕이 어릴쩍부터 비범(非凡)하여 사람들이 모두 대절(大節)할 재목감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초유사(招諭使) 김학봉(金鶴峰)의 천거로 영산별장(靈山別將)이 되어 형확(確), 초(礎) 그리고 조카 순의(順義)와 더불어 활약하였다. 임진년(1592) 10월, 제1차 진주성(晋州城) 싸움에 사천현감(泗川縣監) 정득열(鄭得說)이 성외(城外) 전투에서 전사(戰死)하자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은 지용(智勇)이 뛰어난 그를 사천수(泗川守)로 임명하여 사천군사와 함께 싸우게 하였다. 이때 진주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그는 분의선등(奮義先登)하여 왜적 수십인을 작살내던 중 적탄을 맞고 쓸어졌다. 그는 탄식하기를, “내가 불행을 당한 것은 어렵지 않으나, 나라의 해로운 일을 당하여 이 일을 어찌 할고나(吾之不幸非難奈國事何因過善)”고 하였다. 또한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은 “이 사람은 위태로운 남녘 일면을 지킬 사람인데, 이미 의로운 한 남자를 잃게 되었구나(此人可作南陲一面而今巳死之失一義男子也)”고 탄식하였다. 진수성 싸움에서 그의 넷째 형 확(確)과 조카 순의(順義 ; 副司果)는 전사(戰死)하고 뒤에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록권(錄卷)에 올랐다. 압은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의금부사(義禁府事)에 추증되고, 고종 때 계양사(桂陽祠)에 제향되었다.   19세손 방동(芳東)은 사천현감(泗川縣監) 압(압)의 둘째 아들로서 선비(先妣) 창원황씨(昌原黃氏)와 함께 상주내면 운곡(上州內面 雲谷 : 현 정동면 반룡마을)에 살았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되었다. 20세손 정익(貞益) 또한 증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21세손 계망(啓望)은 1670년(현종 11)생으로 수직(壽職)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함이 내렸고, 숙부인(淑夫人) 강양이씨(江陽李氏)는 지극(至極)한 효열(孝烈)로서 정려(旌閭)가 내렸다. • 22세손 경택(景澤) : 증직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25세손 여준(汝准) : 증직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 • 28세손 영도(泳圖) : 一名 鳳基, 자 華善), 1823년(순조 23)에 출생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지냈다. 입향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12대째 세거해 오고 있으며 손세는 40여호에 달했으나 지금은 거의 경향각지로 나가서 산거(散居)하고, 세거지인 현 반룡마을에는 겨우 4세대가 남아 선영을 지키며 향화(香火)를 받들고 있다. 문중 대표는 독농가이자 이장을 지낸 30세손 용조(容朝)이고, 종손은 32세손 수실(守吉)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 문중분포 : 삼천포, 진주, 마산, 부산,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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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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