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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 밀양손씨(密陽孫氏) 군사공<영>파(郡事公<榮>派), 수성진사공파(壽星進士公派) (감곡)   시조(始祖) 휘(諱)는 순(順)의 선계(先系)는 신라의 사로(斯盧) 6촌의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촌장 구례마(俱禮馬)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57년 구례마가 다른 5촌장 등과 함께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 초대왕으로 추대하여 개국공신에 올랐고, 그 후 서기 32년(유리왕9)에 손(孫)으로 사성(賜姓)받아 손씨(孫氏)가 창성(創姓)되었다.   후손 순(順 : 시호 文孝)이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 826~836) 때 효자로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으므로 그를 시조(始祖)로 하여 기세(起世)하고 순(順)의 손자 익감(翼減), 익담(翼淡), 익원(翼洹)의 3형제 중 익감(翼減)이 신라조에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 : 밀양의 고호)에 봉해졌고, 익감의 현손 긍훈(兢訓)이 고려 태조 때 신기한 군공이 있어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졌다. 응천(凝川)과 광리(廣理)가 밀양의 옛 이름인 까닭에 본관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으 묘소는 경북 월성군 건천읍 모량리에 있다.   밀양손씨의 중흥조(中興祖)인 긍훈(兢訓 : 7세)은 문충공 도량(文忠公道良)의 아들로서, 신라의 국운이 다 됨을 깨닫고 송도로 가서 왕건(王建)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후 후백제의 신검(神劍)이 아버지 견훤(甄萱)을 가두고 스스로 왕이 되려하자 견훤이 탈출하여 왕건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그 때 긍훈(兢訓)은 기병 1만5천을 거느리고 가서 신검군을 황산군(黃山郡 : 지금의 연산지방)에서 대파하고 신검을 사로잡은 후 그 공으로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지고 대광사도(大匡司徒)를 추증하였다. 사후에 고을 사람들이 밀양읍 동쪽 진화산 위에 사당을 세워 그를 제향했는데 그 후 난리가 있을 때면 영검을 나타내어 적을 섬멸하고 백성을 보호했다고 한다. 밀양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시조(始祖)의 19세손 빈(贇)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한 백분(白賁)의 아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충선(忠宣), 충숙(忠肅), 충혜왕(忠惠王) 3조에 걸쳐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충숙왕 때 여진족(女眞族)이 변방을 침범하자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이를 격파함으로서, 온성(穩城)에 <정북대장군 손빈지비(征北大將軍 孫贇之碑)>라는 전승비(戰勝碑)가 세워졌다. 그 후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오르고 1340년(충혜왕 복위1)에 조적(曺頔)이 난을 일으키자 조적을 베고 토평(討平)하여, 그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 수국사(修國史), 정당문학(政堂文學), 상장군(上將軍) 등을 역임하고 사도(司徒)에 올았으며 밀성군(密城君)에 봉(封)해졌다.   아들 20세손 광(洸)은 고려 때 광록대부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슬하에 4형제를 두어 1자 탁(탁)은 벼슬이 좌사부(左師傅) 좌우교위로서 좌사부<탁>파(左師傅<탁>派), 2자 하(賀)는 1274년(원종15)생인데, 봉순대부(奉順大夫)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역임하고 전농공<하>파(典農公)<賀>派), 3자 타(타)는 중서령(中書令)으로 중서공<타>파(中書公<타>派), 4자 영(榮, 초휘)은 충렬왕 때 문과에 등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군사(郡事)를 지내니 군사공<영>파(郡事公<榮>派)로 갈라졌다. 이중에서 군사공<영>파계는 25세 대에 이르러 목사공<策>파를 비롯하여 군수공<笈>파, 전사공<智>파, 오곡공<壽齡>파 등 12파로 분파되었다.   25세손 수성(壽星)은 군사공(君事公) 영(榮)의 4대손으로 부조(父祖)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진사로서 수성지사공파(壽星進士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는데 경상도 창원(昌原)에서 살었다. 묘소는 양위분 함께 창원 남면 덕천리 건좌(乾坐)에 합봉(合封)으로 되어 있다.   31세손 기용(起龍)은 파조 진사공(進士公) 수성의 7세손으로 1554년(명종 9)생. 선조 때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인 30세손 진보(眞寶)의 아들로 자는 홍서(弘瑞)이고 호는 송당(松堂). 선조 때 군위현감(軍威縣監)을 거쳐 평안도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금릉군(金陵郡) 감천면(甘川面)에서 세거해 오다가 가세(家勢)가 차츰 기울어져 가자 36세손 사경(師慶)의 아들 계승(繼勝), 계언(繼彦) 형제가 고성군 대가면(大可面)으로 이주(移住)하였다.   입향조(入鄕祖)는 37세손 계언(繼彦)의 둘째아들 경익(敬益 : 일명(一名張俊.38세)이 고성 대가면에서 입정동 하여 감곡에 터전을 잡고 겨우 가계를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입향조의 산소는 고성 대가면 도산 임좌(壬坐)이고, 배위(配位) 광산김씨(光山金氏)의 묘는 정동면 감곡산 소당곡(小堂谷) 계좌(癸坐).   문중 대표는 41세손 을주(乙注, 보명 燉注)이고, 조손은 42세손 규분(圭俊)으로 대구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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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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