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일 가능성이 있는 「뗀석기」들이 인근 삼천포에서 발견된 적이 있고 선진리와 금문리에서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 B.C6000 ~ B.C1000)유물인 조개무지(貝塚)가 발견되었으며 덕곡리(지방기념물 제49호)를 비롯하여 신복리(新復里), 용치리(龍峙里), 구월리(龜月里), 송지리(松旨里)에서 청동기시대 (靑銅器時代 : B.C1000 ~ B.C300) 유물인 지석묘(支石墓) 및 송지리(松旨里)의 돌널무덤 (石棺墓)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우리 고장은 약 1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성립된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하고 그 변진(弁辰) 12국 중의 하나인 고순시국(古淳是國 : 현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部族國家)으로 비정(比定)한다.
B.C 1세기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三國)이 성립하였고 기원 후 1세기경부터 변진의 전통을 계승한 6가야가 형성되었는데 변진지역 가운데는 3세기초 가야제국에서 이탈한 지역이 있으니 경남 남해안에 형성된 별도의 세력인 포상팔국(浦上八國 : 保羅國, 古自國(現 固城), 史勿國 (現 泗川) 等) 이였다.
※「사물국」은「사이물」이라는 우리말에서 사물(史勿)로 음차되고 사수(泗水)로 훈차(訓借)였다고 본다. 이들 8국의 활동은 209년에서 212년까지 잠깐 보일 뿐 이후 이 지방에 대한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세력은 이때부터 점점 약화되어 종래는 가야세력권에 흡수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이후 우리지역은 고성을 수부로 하는 소가야에 속했다고 보고 있다. 6가야 중 소가야는 김수로왕의 6형제 중 막내인 말로왕이 기원 후 42년에 건국하여 9대 이형왕 즉, 신라 법흥왕 19년(532) 신라에 통합 될 때까지 491년간 지속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가야 진출과 일본서기의 기록을 감안해 보면 사천 지역은 백제의 영유(340년경부터 380년경까지 추정)로 되었다가 법흥왕 19년 이후 신라의 지배에 들어갔으며 진흥왕23년(562)년 신라에 의해 나머지 가야국들이 병합 되므로서 가야제국의 역사는 마침내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삼국시대 후기인 백제 무왕 2년(605)을 전후하여 문무왕 3년(663)까지 진주목(晋州牧)은 백제(白濟)의 거열성(居列城 : 현 진주)에 인접한 우리 사천권도 한때 백제의 영향 밑에 있다가 다시 신라의 항구적인 지배아래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이후 사물국은 사물현(史勿縣)으로 강등하여 치소(治所)가 우리면 석계리(石溪里)에 있었다. (3세기초 209년, 아니면 이보다 앞선 시기부터 사수(泗水)라 고친 757년까지 있었다고 본다.) 신문왕(神文王) 5년(685) 전국에다 처음으로 9주5소경을 설치했는데 이때 우리지역은 지금의 진주를 청주(靑州)라 하고 총관(摠官) 밑에 군.현을 두었는데, 사물현은 종래의 명호(名號)를 그대로 습용한 채 고자군(古自郡 : 현 固城)의 영현으로 되었다.
경덕왕16년(757) 12월에 이르러 사수현으로 개명하고 치소는 내지 평야로 이전하여 지금의 정동면 고읍리에 있었다. (757년부터 조선시대 세종27년(1445)까지 690년간 읍기가 이곳에 있었다.) 이 때 고자국은 고성국으로 고쳤으며, 사물이 사수로 훈차 되어 한식화 하였다.
고려 태조19년(936) 9월에는 후백제의 神劍(신검)이 강주도독 양검(康州都督 良劒)과 무주도독 용검(武州都督 龍劒)과 함께 왕건(王建)에게 항복 하므로써 강주(康州)는 비로소 고려에 영속되었다. 고려 태조23년(940) 3월에는 강주(康州)를 진주(晋州)라고 개명하였다. 성종2년(983) 2월에는 신라 때 이래의 주제(州制)를 폐지하고 처음으로 전국에 12목(牧)을 두었다. 성종14년(995) 5월에는 12목을 12주(州)의 절도사로 고쳤다. 그리고 9월에는 처음으로 전국에 10도(道)를 두었는데 이 때 진주(晋州)에는 산남도(山南道)가 설영되어 10주 37현을 소관했고 우리면 지역인 사수현(泗水縣)은 고성군의 영현에서 진주목 관할로 이속 되었다. 이에 앞서 동왕 11년(992) 7월에 고려 왕실의 종친이자 성종 임금의 숙부인 왕욱(王郁 : 태조 왕건의 여덟 째 아들)이 사수현(泗水縣)에 내려와 귀양 살다 죽었다.)
현종 6년(1015) 윤 6월에는 사수현을 높혀 사주로 개명하였다. 이는 현종이 어릴 때 사수현에 내려와 정동면에 있는 배방사에서 10년 동안 우거(寓居)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 욱(郁)이 귀양살다가 죽은 곳이기 때문에 주(州)로 승격 시켰다.
문종 18년(1064) 5월에 10도에 두었던 안찰사를 도부서(都府署)로 개칭하였다.
예종 원년(1106) 5월에는 종전의 영남도, 영동도, 산남도를 통합하여 경상진주도(감영은 경주)라 고쳤으며 동왕 8년(1113)에는 다시 도부서를 없애고 안찰사를 두게 된다. 명종 원년(1171)에는 경상진주도를 나누어 경상주도(감영상주), 진협주도(감영은 진주)의 양도로 나누었다. 명종2년(1172) 6월에는 전국 56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설치하고 지방관이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진주목 속현(屬縣)에서 벗어나 외관(外官)이 다스리는 주현이 되었다. 명종16년(1186) 당시 양도를 합하여 경상주도(감영은 상주)라는 이름으로 고쳐지고 사천권은 여기에 속했다. 신종7년(1204)에는 안동도호부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경상주도를 고치어 상진안동도(감무는 상주)라 하였다.
충열왕 24년(1298)에는 상진안동도를 경상진안도로 개칭하여 안렴사를 두었고, 충숙왕 원년(1314)에 비로소 3주를 합하여 경상도(감무는 상주)라는 도의 명칭이 고정되었다.
태종13년(1413) 10월에는 각 도의 단부 고을을 도호부로 고치고 고려 때 감무를 현감(종6품)으로 고쳤다. 따라서 군, 현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곳은 전부 산(山)자, 혹은 천(川)자로 고쳤다. 이때 사천은 내 천(川)자를 취하여 사천이라 하고 별칭을 동성이라 했다.
태종 15년(1415) 9월 21일에는 고려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사천지역을 군사 전략기지로 설정하고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하는 사천진을 설치하였다.
세종5년(1423)에는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낮추고 얼마 후 다시 현감으로 환원되었다. 동왕27년(1445)에는 사천읍성의 축성으로 읍기를 지금의 정동면 고읍에서 사천읍성으로 옮겼다. 이로써 가야시대 이래 줄곧 있어 온 고읍의 행정 치소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사천읍성 시대를 맞게 되었다.
세조12년(1466)에 이르러 종전의 병제를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편하였는데 그 산하인 용양위(좌위)의 지방조직으로 진주에 경상우부 진관이 설치됨으로써 사천진은 동왕14년(1468)에 혁파(革罷)되고 다시 현감으로 고쳐졌다.
진관 체제는 세조3년(1458)에 군익도 체제로 전국적으로 개편한 것인데 이때 사천의 중익진은 그 중요성에 비추어 그로부터 11년 뒤에 혁파되고 진주진관 소속의 제진(諸鎭)이 되었다. 당시 사천지역은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무관으로 하여금 현감을 겸하게 하였다.
태조5년(1396) 8월에 우리면 통양포에 왜구가 쳐들어와서 병선(兵船)을 약탈해 간 사건이 있었다. 한편, 조선조 전기 때의 사천현 방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개 방위에 따라 4개면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나 추측한다.
임진왜란 후 17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인 범위에서 면리제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숙종1년(1675) 9월 오가통의 사목에 의하면 사천현은 상주내면, 동면, 근남면, 삼천리면, 하남면, 중남면, 상서면, 하서면, 북면의 9방면이었는데 우리 면의 전신(前身)은 중남면과 하남면이였다. 하남면은 지금의 송지리 이남 지역이었고, 중남면은 석계리 이북 지역으로 추측된다.
고종32년(1895) 5월26일 전문 6조로 된 칙령 제98호에 의거 태종13년(1413) 이래 482년간 시행해오던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제로 시행하면서 종전의 5부, 20목, 75도호부, 77군, 148현을 군(郡)이란 이름을 통일하여 336군으로 개편했다. 이에 따라 사천현은 사천군으로 개칭(改稱)되어 군수(郡守)를 두었다. 이때 진주는 지금의 도격인 진주부가 설영 되어 21군을 소관 했고 그 21군 중에 사천군이 속해 있었다.
건양1년(1896) 8월 4일에는 칙영 제35호로 23부제를 폐지하고 동일자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다시 13도(道)로 구분하여 도에 관찰사를 두고 아래로는 1목, 9부, 329군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진주는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으며 아울러 경상남도는 1부 29군을 소관하고 사천군은 9방면(坊面)을 소관 했는데 당시의 방면은 상주내면, 동면, 근남면, 중남면, 하남면, 상서면, 하서면, 삼천리면, 북면이었다. 이듬해인 고종34년(1897) 8월 14일에는 연호(年號)를 광무로 건원(建元)하고 10월 3일에는 왕은 황제로, 10월11일에는 국호(國號)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으며 행정의 말단 조직인 방면(坊面)이 면(面)으로 개칭되었다.
광무10년(1906) 9월24일에는 칙령 49호로 지방행정구역의 대폭적인 개편이 있었는데 진주군의 75면 중 문선면, 남양면을 고성군에, 삼천포면을 사천군에 이속(移屬) 했고 1907년 8월에는 연호를 융희(순종)로 고치고 통감부 경무부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호구 조사를 하고 9월에는 고성군의 남양, 문선면을 편입시켜 군내면(5), 상주내면(14), 동면(16), 근남면(14), 수남면(20), 하남면(15), 중남면(14), 상서면(9), 하서면(9), 북면(8), 문선면(2) 등 11면 126동리를 관할하게 되었고, 중남면은 석계, 세암, 관동, 신복, 평기, 온정, 용정, 신촌, 종포, 화촌, 조금, 통양, 화계, 연포 등 14개동리이며 면소는 신촌동 개머리에 있었고 하남면은 신덕, 신평, 주물, 신청, 신금, 금호, 부곡, 봉곡, 개치, 용유, 금구, 마월, 평송, 신송, 장송 등 15개동리로 면소는 부곡에 있은 듯 하다.
1909년 12월에는 진주에서 사천을 통과하여 삼천포에 이르는 국도 3호선이 개통하였다. 진주~삼천포간의 도로 개통은 경상남도 내에서는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선진항이 개항되어 서부 경남의 내륙을 통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이 무렵 조선조의 기운은 차츰 기울어지고 있었고 을사조약(1905)에 이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1906)했던 일본 제국주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므로 조선조는 결국 1910년 8월 22일에 한일합방이란 국치(國恥)를 당하여 27대 역년 519년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융희4년(1910) 8월 22일에는 일제 강점의 국치를 당했고 8월 29일에는 국권을 상실 당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국호는 폐지되고 조선으로 개칭되어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9월에 행정의 최하부 조직으로 면제(面制)가 시행되었다.
1914년 3월 1일에는 부령 제111호(1931. 12. 31. 공포)에 의거 전국의 317군을 218군으로 하고, 4,315면을 2,517면으로 하는 군·면폐치분합의 개편이 있었는데 이 때 사천군은 곤양군의 8개면과 진주군의 부화곡면과 축곡면 연향동을 편입시켜 읍내, 읍동, 읍서, 읍남, 남양, 수남, 문선, 축동, 곤양, 곤명, 서포 등의 11면 117동리로 개편했다.
중남면의 14개 동리와 하남면의 15개 동리, 남양면의 대선동 일부를 병합하여 12개리로 개편하여 읍남면이라 하였으며 면사무소 소재지는 석계리(육고개)에 있었으며 12개리는 다음과 같다.
1917년 6월 9일 총독부령 제1호에 의하여 면제가 공포되고 같은 해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1918년 5월 10일 수남면과 문선면을 합하여 삼천포면으로 개칭하였다. 또 1925년에는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의하여 읍내면을 사천면으로 고쳤다.
1931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2호(1930년 12. 1 공포)의 시행에 따라 종래의 지정면을 읍으로 승격 시겼다. 지정면이란 1917년 면제에 의한 면 가운데 인구가 제일 많은 면을 지정한 곳인데 이는 1920년 면제의 개정으로 보통 면과는 그 처우를 달리하는데 비롯된 것이다.
그 후 1931년 8월에는 읍동면을 정동면으로, 읍서면을 사남면으로, 읍남면을 용현면으로 개칭하였고 이 해 11월 1일 삼천포면을 삼천포읍으로 승격시켰다.
1945년 8월 15일에는 치욕의 역사에서 드디어 광복되고 1948년 8월 15일에는 대망의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1949년 8월 15일에는 법률 제32호(1949. 7. 4 공포)에 의한 지방자치법의 시행으로 읍면(邑面)을 최하위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로 결정했다.
1956년 7월 8일 법률 제390호에 의하여 삼천포읍은 남양면과 합하여 삼천포시로 승격되어 사천군에서 분리되었고, 같은 일자 법률 제393호에 의하여 사천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다가 1961년 10월 1일에는 법률 제707호(1961. 9. 1공포)에 의하여 읍.면자치제를 폐지하고 군(郡)을 최하위 지방자치단체로 결정했다.
1988년 8월에 우리 면의 면사무소의 구청사를 헐고 송지리 228의 1번지에 214평 규모의 2층 슬라브 건물을 신축하여 1989년 4월 1일 준공식을 갖고 집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소도읍 정비사업으로 면소재지의 면모를 일신했다.1991년 3월 26일 군의회(郡議會) 구성을 위한 지방자치 선거가 30년만에 실시되었다.
1995년 5월 10일에는 도농복합형태의시설치등에관한법률 제4948호에 의거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통합되어 사천시로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면은 사천시 용현면으로, 삼천포 경찰서 용현지서는 사천경찰서 용현파출소로 개칭되었다.
1996년 11월 26일 사천시 통반구역조정 공고 제96-423호로 용치2리의 행정리를 없애고 용치1리의 1개반으로 조정되었으며 2011년 6월 1일 사천시조례-952호에 따라 행정구역 조정되어 12개의 법정리(法定里)와 31개의 행정마을을 관장하고 자연마을은 23개로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