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용현면지



용현면

우리면이야기

용현면지

선진(船津)

<선조실록>에 의하면 선진의 지명이 여럿 나타나는데 이를 살펴보면 이순신장군의 사천해전 때에는 선창(船滄), 정유재란 때에는 법질도, 신채, 동양, 동양창 따위로 기록하고 있고 조선 후기에는 이 곳에 삼천진보가 설치되어 선진 또는 선소라 했으며, 구한말 때에는 화계라 고쳐 불렀는데 지금은 선진(船津)이라고 부르고 있다.

연호(蓮湖)

1914년경의 기록에는 연포라는 지명으로 되어 있고 흔히 연개라고 부른다. 일부 사람들에 의하면 굴강(구강)에 염전이 있어 염포(소금을 만들고 실어 나른 갯가)라고 하기도 하고 염전이 있던 곳이 연밭으로 변하여 오늘의 연호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나 정확한 연원은 알 수가 없다.

신기(新基)

석거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1965년에 개통하여 1980년 10월 1일 적자운행으로 폐지되기까지 진삼선 철도의 선진역이 있었던 마을이며(개양에서 사천읍간의 철도는 1953년에 개통하였음) 1963년에는 용남공설시장이 섰던 곳으로 유흥업소도 많았고 경제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1952년 5월 1일에 개교한 용남중학교와 1967년 10월 5일 개교한 용남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석거리는 섬거리가 변음되었다고도 하는 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덕석골에서 나는 곡식을 섬에 넣어 쌓아 두던 거리라 하여 섬거리란 이름이 생겼다고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이야기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통양(通洋)

통양마을은 바다로 통하는 마을이라고 하여 통양이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전한다. 밀양 박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으나 창녕 조씨가 제일 먼저 입향하였다고 한다. 1469년(예종 1년)에 발간된 경상도속찬지리지 사천조에 '염분 재현남통양창포리 즉, 소금을 모으는 곳은 현 남쪽에 있는 통양창포이다.' 라는 기록과 숙종25년(1699)에 간행된 사천현여지승람기묘수정책 산천조에 '통양포 ; 현 남쪽 바다에 있다.' 라고 되어 있고, 중종 26년(1531)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는 '통양포 ; 현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라고 되어 있으며 1935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하는 사천환여지승람 사천조에 '통양포 ; 군의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촌리(新村里)

1675년(숙종1년) 오가통의 사목에 의하면 사천현 9방면의 하나인 중남면에 속하여 있었고, 1895년(고종32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목, 부, 군, 현의 명칭과 관명의 변경에 따라 진주부 사천군 중남면으로 되고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5호 23부제 폐지와 제36호의 13도 설치에 따라 경상남도 사천군 중남면으로 되었다. 1907년 지방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중남면 14개 동리 중의 신촌동, 종포동, 화촌동으로 되어 있다가 1914년 4월 1일 부령 제111호로 군,면 폐치분합에 따라 중남면과 하남면을 합하여 읍남면으로 하고 신촌동, 종포동, 화촌동을 합하여 읍남면 신촌리(신촌, 종포마을)로 하였다. 1931년 4월 읍남면을 용현면으로 고쳐 용현면 신촌리로 되었으며 1995년 5월 10일 법률 제4928호 도농복합형태의 시 설치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사천시 용현면 신촌리로 되었다.

신복(新復)

봉대산 아래 위치하고 있는 동네가 신복인데 1914년 4월 1일 이전에는 "申伏"으로 쓰다가 음은 같으나 글자를 "新復"으로 다르게 적은 사유는 어떻게 된 것인지 아는 이도 없고 문헌에도 찾을 수 없으나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들이 마을 이름을 바꾸지 않았나 하고 추측한다.

평기(坪基)

신복 서쪽 국도변에 위치한 마을로써 약 400여년전 임란 공신인 경주인 이잠 이후 입사천 후손들이 낮으막한 언덕을 개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여 뻔득물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1907년 지방행정구역 정리시의 기록상에는 평기동으로 되어 있으나 간간히 '뻔득몰' 또는 '뻔득머리'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온정(溫井)

옛날에 어떤 술사가 된 먼당(세암 뒷편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산 아래에 펼쳐져 있는 지세를 살펴보니 봉대산에서 뻗어내린 산세가 예사롭게 생기지 않아 이 산세의 마지막 끝나는 지역에 온천을 품고 있을 것이라는 지형 설명이 있어 그 곳을 살펴보니 과연 그 곳에 따듯한 물이 나오는 샘이 있으므로 온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용정(龍井)

마을 뒷산 지형의 생김이 서쪽 강지바다를 보고 있는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동네 이름이 '용머리' 또는 '용머리땀'이라 불리고 있으며 이창호씨집 부근의 샘에서 용이 승천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어 "용정"이라는 설도 있다.

석계(石溪)

석계마을은 본동네, 육구개, 사랑미, 못골 등 4담으로 이루어져 있고 은진송씨 집성촌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흥왕 이후부터 아니면 그보다 훨씬 앞선 사물국시대부터 현기가 정동면 고읍리로 옮긴 757년까지 치소가 있었으므로 땅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하였으나 의외로 구전되어지는 이야기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석계는 돌개(물이 돌아 흐르는 개울가의 마을)라는 지명의 음 훈차라고 본다. 돌개에서의 돌은 돌다의 뜻이고 계는 물가의 뜻으로 돌이 돌석자로 훈차(뜻을 빌림)되고 개는 계로 음차(음을 빌림)되었을 것으로 본다.

구월(龜月)

마드리라고도 부른다. 웃땀(골땀)과 건넛땀으로 형성되어 있고 산록변에 마을이 펼쳐져 있다. 합천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함안조씨 등 몇 성받이가 거주하고 있다. 구월이라는 명칭은 1914년 4월 1일 군.면 폐합치 분합에 따른 행정조직 개편시 처음으로 구월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이는 구정(구북이는 장수를 의미함)의 거북'구'자와 마월의 달'월'자를 합하여 구월이라 하였다고 한다.

금구(金龜)

금구는 용치저수지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함안조씨, 인동장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김해김씨가 제일 먼저 입향하였으나 그 후손은 현재 거주하지 않고 있다. 금구라는 명칭은 김해김씨가 제일 먼저 입향하여 살았다 하여 성 '김'자와 구정 냇고랑에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였는데 거북이는 장수한다는 뜻에서 거북 '구'자를 합쳐 금구라고 명명하였다는 설과, 다른 한 설은 동쪽의 산줄기와 쇠금자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거북구자와 합하여 금구로 명명되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용치(龍峙)

용치는 용치저수지 바로 위에 있는 동네로 진주강씨 집성촌이나 제일 먼저 입향한 성씨는 압해정씨였다고 한다. 용치라는 명칭은 1914년 4월 1일 지방조직개편때 개치와 용유를 통합하여 처음으로 용치라 명명되어 졌다.

신송(新松)

옛날에 '오동지'라고도 불렀고 장시, 따앗모르 새땀으로 형성되어 있다. 현재의 송지천 방천은 일제시대에 막은 것으로 이 방천이 생기기에는 지금의 마을회관 앞에 오동나무 숲이 있어 '오동지'라고 했다.

장송(長松)

오계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남쪽으로 길게 동네가 형성되어져서 '진송지' 또는 그냥 '송지'라고도 불리고 잇으며 지금의 마을회관을 경계로 하여 웃땀, 아랫땀으로 구분되어 진다.

평송(坪松)

송지천 남쪽에 길게 형성된 마을로 옛날에 대밭이 많아 '대밭땀'이라고 부르고 있다. 앞땀, 뒤땀의 2개 땀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구분되어지지 않고 연이어져 있다.

주문(朱文)

주문마을은 웃땀과 나루가 있었던 아랫땀으로 형성되어 있고 동네 이름이 조선시대에는 주물로 되어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주문으로 된 연유를 알 수 없으나 일제가 억지로 바꾸었다고 본다.

덕곡(德谷)

덕곡마을의 옛 이름으로 물이 좋고 농토가 많아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신덕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덕곡이라는 명칭은 신덕의 큰'덕'자와 백천골의 긴 계곡 아래에 있다하여 골'곡'자를 합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신평(新平)

용현면의 제일 남쪽에 있는 마을로 위신평과 아랫신평으로 형성되어 옛날에는 밭이 많은 지역이었으나,지금은 경지정리가 되고 용수가 풍부하여 논으로 변모하였으며 농업과 어업이 병존하고 있다.

금문(琴聞)

금문마을은 인근 동쪽에 있는 장터(부곡)마을에 하남장이 서므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사방으로 길이나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으면 거문고 소리를 들을 수있는 아름다운 마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금문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으나, 금문리의 지명은 '검물'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검물의 '검'은 크다, 많다의 뜻인 고어인데 물이 많은 동네라 하여 검물이라고 불렀다고 본다. 와룡산의 북서면인 도솔골과 심적골의 물이 백천골에서 합하여 배치와 신덕을 거쳐 내려오는 시내의 물이 많아서 검물이라고 부르다가 금문으로 변하였다고 본다.


담당자
용현면 총무팀 055-831-5114 / 팩스 : 055-831-6074
최종수정일
2016-07-12 13:50:01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