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7. 봉계리(鳳溪里)   문헌(文獻)에 이조(李朝)때 완사역(浣沙驛)에 딸린 봉계원(鳳溪院)이 있었으므로 원(院)이 소재지(所在地)란 뜻에서 나온 동명(洞名)이 원전(院田)이다.   충무공(忠武公)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삼가(三嘉)에서 노량(露梁)쪽으로 행여(行旅)할적에 수군패보(水軍敗報)를 들은 십오리원(十五里院)이란 곳이 오늘의 원전(院田)이다.   봉계리(鳳溪里)의 유래는 앞 산의 봉알자리(飛鳳抱卵)와 초량천(草梁川)의 내가 흐르고 있으므로 봉계(鳳溪)로 명명(命名)된 것이다.   원전(院田)에서 마곡(麻谷)으로 넘나드는 산길은 옛날 산청(山淸), 옥종(玉宗)에서 곤양(昆陽)으로 통(通)하는 대로(大路)였다 한다. 산마루 길 옆에 돌무덤(石墓)이 수기(數基) 산재(散在)되어 있는데 사당(寺黨) 무덤이라 전해지고 있다. 옛날 사당(寺黨)패에서 행여사(行旅死)하면 죽은 곳의 가까운 산길 옆에 묻는것이 그들의 버릇인데 이곳도 그 무덤이었다 하며 길손이 그곳을 지나면서 지금도 돌을 던저 그들 원귀(怨鬼)를 달래고 있고 고개 먼당에는 서낭당(城隍堂)이 현존하고 있다.   하동(河東), 곤양(昆陽), 방향(方向)의 갈림 길이기도 하여 옛날에는 삼거리(三巨里)로 호칭된바도 있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이곳에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가 설치되어 면내(面內) 우국지사(憂國之士)를 고문(拷問)한 곳이기도 하며 그 자리에 지금은 곤명지서(昆明支署)가 들어서 있다.   1930년 사설(私設) 광명학원(光明學院)이 설립(設立)되어 민족교육도장(民族敎育道場)으로 각광(脚光)을 받았는데 당시(當時)의 강사진(講師陳)은 후일(後日) 건국시(建國時) 정계(政界)와 학계(學界)의 쟁쟁(錚錚)한 인사(人士)들이었다.   1968년 경전선(慶全線) 철도의 개통으로 다솔사역(多率寺驛)이 마을 앞에 설치(設置)되었으며 1979년 취락구조개선(聚落構造改善)으로 25호(戶)의 농촌주택(農村住宅)이 개량(改良)되었다.   마을은 “안마을”과 “바깥마을”로 되어 있고 두 마을 중간(中間)에 휘귀목(稀貴木)인 입화목(立花木, 일명 사화목)이 150년의 연륜(年輪)을 가져 보호수(保護樹)로 지정(指定)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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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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