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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7. 고려시대(高麗時代)   신라 말기에 송도(松都)의 호족(豪族)으로 잠시 태봉(泰封)의 궁예(弓裔)에게 몸을 의지 했던 왕건(王建)은 민족융화(民族融和) 숭불주의(崇佛主義) 북진주의(北進主義)라는 삼대국시(三大國是)를 건국이념으로 하여 고려(高麗)를 세우고 그의 년호(年號)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태조 왕건은 즉위한지 19년(936)만에 후삼국(後三國)으로 분열된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고 신라 말기 이래로 혼란에 빠진 정국을 수습하면서 집권국가(集權國家)의 건설에 힘썼다.   그러나 이때 고려 왕실에 대하여 비록 항거할만한 큰 세력은 소멸되었다고 하드래도 각 지방에는 호족들이 거의 독립적인 상태에선 여전히 웅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왕조가 이러한 세력가들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지방체제를 확립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일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태조 왕건은 즉위한 초기부터 이들을 중앙정권에 흡수하기 위해 회유와 강제의 양면으로 초무(招撫) 또는 선무(宣撫)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그 자제들을 인질로 선상(選上)케 하는 소위 기인제도(其人制度)까지 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의 호족에 대하여는 중앙관아(中央官衙)에 상응한 명칭의 향직(鄕職)을 주고 또 지방행정조직을 만들어 이들로 하여금 그 지역을 자치케 하였다.   한편 태조는 그의 23년(940)에 전국의 주, 부, 군, 현(州府郡縣)의 명칭을 개정 하였는데 이때 강주(康州)는 진주(晋州)로 개칭됐고 하읍현(河邑縣)은 곤명현(昆明縣)으로 개칭되어 계속 하동군(河東郡)의 속현(屬縣)으로 있었다.   성종 2년(983)에는 앞서 신라의 신문왕이 9주를 설치한 이래 298년 동안 습용해오던 주제도(州制度)를 목제도(牧制度)로 개혁하였는데 이때 진주는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晋州牧)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조직이 있은 후 고려는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하는 그 특이 잡힌셈이 되는데 이러한 정비가 진행중이던 동6년(987)에는 각주군(各州郡)의 병기를 거두어 농기구를 만들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농사의 편의를 도모하게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나 그 근본적인 목적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비상조치의 수단이었다.   그 후 동14년(995) 9월에는 다시 12주의 목을 12주의 절도사(節度使)로 하고 주군(州軍)을 두는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때 진주에는 전국 10도(道) 중의 하나인 산남도(山南道)가 설영되어 진주의 절도사는 10주(州) 37현(縣)을 소관했고 이의 주군(州軍)을 정해군(定海軍)이라고 했다.   현종9년(1018)에는 주제도(州制度)를 다시 목제도(牧制度)로 환원하였는데 이때의 진주목(晋州牧)은 전국 8목 중의 하나였다.   한편 이때 하동군이 진주목의 속군(屬郡)으로 내속(來屬)했고 이의 속현이던 악양현(岳陽縣)과 곤명현(昆明縣)이 진주목의 속현으로 내속됐는데 이때의 진주목 속군과 속현은 다음과 같다.   진주목(晋州牧)   속군 : 강성군(江城郡 : 丹城), 하동군(河東郡)   속현 : 사주(泗州), 악양현(岳陽縣), 영선현(永善縣), 진해현(鎭海縣), 곤명현(昆明縣), 반성현(班城縣), 의령현(宜寧縣) 그 밖에 화개(花開), 살천(薩川)의 두 부곡(部曲)과 창선도(彰善島 : 昌善)가 있었다.   이로부터 곤명현은 조선조 세종원년(1419) 때까지 401년 동안 진주목의 속현으로 이어진다.   예종 1년(1106)에는 앞서 성종14년(995)에 두었던 영남도(嶺南道 : 尙州所管), 영동도(嶺東道 : 慶州所管), 산남도(山南道 : 晋州所管) 등 3도를 통합한 경상진주도(慶尙晋州道 : 監營은 慶州)에 속해졌고 명종1년(1171)에는 경상주도(慶尙州道 : 監營은 尙州)와 더불어 양분된 진합주도(晋陜州道 : 監營은 晋州)에 속해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동2년(1172)에는 하동군과 사주(泗州)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그리하여 진주목 소관의 2군 7현이 1군 6현이 되었는데 곤명현은 계속 진주목의 속현으로 있었다.

  그 후 동 16년(1186)에는 앞서 양분되었던 양도(兩道)가 다시 통합된 경상주도(慶尙州道 : 監營은 尙州)에 속해졌고 신종7년(1204)에는 또 고쳐진 상진안동도(尙晋安東道 : 監營은 尙州)에 속해졌으며 충열왕24년(1298)에는 또 고쳐진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 : 監營은 尙州)에 속해졌다가 충숙왕1년(1314)에는 경상도(慶尙道 : 監營은 尙州)로 굳혀진 이에 속해졌다.   고려말에 이르러 공양왕2년(1390)에는 강성군(江城郡 : 丹城), 의령현(宜寧縣), 진해현(鎭海縣) 등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그리하여 고려말 현재의 진주목의 속현은 곤명현을 비롯하여 악양현과 영선현, 그리고 반성현 등 4현과 그 밖에 화개 살천의 두 부곡, 그리고 흥선도(興善島 : 彰善島를 忠宣王때 改稱함)가 있었다.   한편 고려말에 이르러 두드러진 것은 왜구의 침략이었다.   충정왕2년(1350) 2월에 왜구들이 경상도의 죽림(竹林 : 固城, 지금의 統營)과 거제(巨濟), 그리고 합포(合浦 : 馬山) 등지를 차례로 쳐들어 왔었는데 고려사에서는 이 해 2월의 기록에서 [왜구의 침입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그 이전부터 소규모적인 침구가 거의 해마다 있어 이로 인해 남해안 방면의 농어촌에 적지않은 피해를 주어 왔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공민왕대를 거쳐 우왕때까지는 그 규모가 전례없이 확대되어 고려에 끼친 피해는 매우 컸었는데 이 중에서 진주와 사천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왜구 침략을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공민왕7년(1358) 3월에 왜구는 남해안 각산성(角山城 : 三千浦)에 쳐들어 와서 어선 및 병선 300여척을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2년 후인 동9년(1360) 4월에 또 각산에 쳐들어와 약탈하여 달아났다.   그 이듬해인 동10년(1361) 3월에는 남해현에 쳐들어 와서 민가에 방화하였고 4월에는 고성과 거제에 쳐들어 와서 약탈하였으며 8월에는 사주(泗州 : 泗川)에 쳐들어와서 분탕질해 갔다.   동11년(1362) 2월에는 악양현(岳陽縣)에 쳐들어와서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여 달아났으며 또 2년 후인 동13년(1364) 3월에는 하동, 고성, 사주(泗州 : 泗川)을 침략한 후 분탕질 했다.   동22년(1373) 3월에는 또 하동에 쳐들어 왔고 우왕2년(1376) 3월에는 진주에 쳐들어 온 것을 경상도 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가 격퇴하였으며 11월에는 거제, 고성, 함안 등지를 침탈하고 진주 반성현(班城縣)에 침범해 온 것을 도순문사 배극렴(裵克廉)이 대파했다.   동4년(1378) 12월에는 하동과 진주에 쳐들어 온 것을 도순문사 배극림이 사주(泗州 : 泗川)까지 추격하여 20여급(級 : 1級은 20名)을 베었고 동5년(1379) 5월에는 기병 700과 보병 2,000여명으로 진주에 침범해 오는 것을 원수(元帥) 양백연(楊伯淵)이 우인열(禹仁烈), 배극렴(裵克廉) 등과 함께 반성현(班城縣)에서 13급(260명)을 베는 등 크게 격파했으며 8월에는 경상도원수 우인열 배극렴 등이 사주(泗州 : 泗川)에 쳐들어 온 것을 43급(860명)을 베어 물리쳤다.   또 9월에는 반성현을 침범하여 진을 치고 있는 것을 우인열 등이 포위하고 공격하여 34급(680명)을 베었고 또 단계(丹溪), 거창(居昌), 야로(冶爐)를 침탈하고 가수현(嘉樹縣)에 이른 것을 도순문사 김광부(金光富)가 격멸하다가 전사했다. 이때 왜구는 산음(山陰 : 山淸), 함양(咸陽)과 진주에도 쳐들어와 소동을 일으켰다.   동6년(1380) 2월에는 진주의 영선현(永善縣 : 固城)에 쳐들어 와서 노략질 하였고 8월에는 함양에 쳐들어와 분탕질 했다.   이해 9월에는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3도 도순찰사 이성계(李成桂)와 이두란(李豆蘭)이 운봉에서 섬멸하였다.   동7년(1381) 7월에는 고성에 또 쳐들어와서 약탈하므로 남질(南秩)이 출전하여 8급(160명)을 베는 등 이를 깨뜨렸고 동10년(1384) 11월에는 함양에 쳐들어 온 것을 도순문사 윤가관(尹可觀)과 진주목사 박자안(朴子安)이 18급(360명)을 베는 등 이를 격멸했다.   동11년(1385)년 8월에는 진주에 또 쳐들어 왔으므로 목사 이빈(李賓)이 이들과 격전을 벌렸으나 전사했다.   이와같이 왜구의 침략이 극심하자 창왕1년(1389) 2월에 경상도원수 박위(朴葳)는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 정벌의 장도에 올랐다. 이때 박위는 적의 병선 300여척과 섬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이와 더불어 원수 박자안(朴子安) 등은 사로잡혀 있던 고려인 100여명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그러나 동2년(1390) 7월에 노도와 같이 또 함양에 들어 닥쳤다. 이때 진주등처병마절도서(晋州等處兵馬節度使) 김상(金賞)이 이를 쳐서 크게 깨뜨렸으나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다 전사했다.   이러한 왜구의 침구는 비단 경상도의 남해안 방면만은 아니었다. 특히 우왕시대 14년간은 경상, 전라, 충청도가 가장 심했고, 경기, 강원, 함경, 황해도에 까지 미쳤었다.   이와같이 고려말의 왜구 침구는 고려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고 이에 반해 이성계의 위력은 점점 커져서 결국 이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는 34대 475년으로 그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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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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