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4. 윤선백(尹先伯)   1800년대 사람으로 공직(公職)에서 물러난 노년(老年)에는 곤명 본촌리(本村里)에 거주(居住) 하였으며 선백(先伯)은 호(號)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氣骨)이 건장(健長)하여 비범(非凡)한 사람으로 일컬어 졌고 관년(冠年)에 이르러서 는 힘이 장사(壯士)요, 담(膽)이 세고 용기(勇氣) 있었으니 범인(凡人)의 추종(追從)을 불허(不許)하였고 무술(武術)도 익혔으니 상대(相對)되는 사람 별(別)로 없었다 한다.   철종조(哲宗朝)에 포교(捕校)로 등용(登用)된 이후 용력(勇力)과 날센 순발력(瞬發力) 그리고 뛰어난 기지(機智)로 범인(犯人)으로 하여금 오금을 못 펴게 되었다 하니 그의 공적(功績)은 길이 남을 일이로되 수사사(搜査史)에 문헌(文獻)이 없음이 유감(遺憾)이라고 하고 있다.   어떠한 강력범(强力犯)이라도 윤선백(尹先伯)이 추적(追跡)하면 이에 도피(逃避)를 단념(斷念)하고 스스로 굴복(屈伏)함이 상례(常例)이나 때로는 범인(犯人)이 흉기(凶器)로서 결투대항(決鬪對抗)을 하여도 결(決)코 놓친 일이 없었다 한다.   나라에서는 발군(拔群)의 공노(功勞)를 인정(認定)하여 고종초(高宗初)에 하동 군수(河東郡守)로 임명(任命)되었다. 재관중(在官中) 강력범(强力犯) 사건(事件)에는 포리(捕吏)에 명(命)함이 없이 직접 수사(搜査) 체포(逮捕)에 나섰다. 하니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린 도적잡이」라고 칭송(稱頌)하였다 한다. 재임(在任) 3년 되는 해에 어떤 죄인(罪人)에게 판결(判決)을 내렸는데 후일 진범(眞犯)이 나타나자 오판(誤判)은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자격(資格)이 없다. 자인(自認)하고 칼로서 자신(自身)의 눈을 찔러 외눈을 실명(失明)케 하고 관직(官職)을 사임(辭任) 하여 곤명(昆明) 본촌(本村)에 정착(定着)하였다.   그의 아들 영달(榮達)은 왜정시(倭政時) 본촌(本村) 야학교(夜學校)를 개설(開設)하여 청소년(靑少年) 개화교육(開化敎育)에 노력(努力)한 사실이 있으나 그후 진주(晋州)로 이사(移徙) 하였는데 후손(後孫)의 거처(居處)는 모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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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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