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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3.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   곤명면 다솔사(多率寺) 입구(入口)의 하늘을 찌를듯한 송림(松林) 기슭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각자(刻字)되어 있으니 이 연유(緣由)를 찾아 보기로 한다.   1880년대 이조 고종(高宗) 중엽때의 일이다.   다솔사는 장군대좌설(將軍大座說)로 옛부터 명당(名堂) 대지(大地)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대좌국(大座局)의 명당(名堂) 자리에 선영(先塋)을 안장(安葬)코저 결행(決行) 일정(日程)을 잡았다.

  다솔사 측으로 본다면 사찰(寺刹)의 명운(命運)이 걸린 일이 었으나 감사(監司)의 권세(權勢)에 눌리어 어떤 방안(方案)도 못 내고 멀지않아 절(寺)은 폐허(廢墟) 될 것을 예견(豫見)하며 한탄(恨嘆)만 되풀이 하였다.   이때에 절에서 참선(參禪) 수학(修學) 중이던 호암(虎岩) 정암(正菴)의 두 스님이 결연(決然)한 마음을 갖고 전사승(全寺僧)과 신도(信徒)의 연서(連署) 탄원서(嘆願書)를 가지고 자청(自請) 상경(上京)하여 상소(上疎) 할 것을 책임(責任)지고 잔류(殘留) 승려(僧侶)에게는 돌아 올때까지 어떠한 난관(難關)이 있어도 입장(入葬)을 방어(防禦)하도록 당부하고 상경(上京) 길을 떠났다.   이 무렵 천왕봉(天王峰) 밑에 있는 미륵암(彌勒庵)의 부처님 영험(靈驗)이 대단(大端)하다 하여 신도수(信徒數)가 다솔사 보다 많았음으로 이들에게 호소(呼訴)하여 동정(同情)을 받아 함께 가세(加勢)하게 이르렀다.   두 스님이 상경(上京)한 수일(數日) 후 감사(監司)는 장례(葬禮)를 치루고져 다솔사 까지 왔으나 수백명의 승려(僧侶)와 신도(信徒)들이 장례 하려는 곳에 돌 팔매를 우박 쏟 듯 하며 결사반대(決死反對) 함으로 부득히 강행(强行)을 중단(中斷)하고 후일을 미루며 하산(下山)하였다.   한편 상경(上京)한 호암(虎岩) 정암(正菴) 두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걷고 걸어 목적지 서울에 닿아 돈화문(敦化門)에 이르니 저 멀리서 쉬잇 소리를 외치면서 어느 대관(大官)이 행차(行次)를 하는데 나졸(羅卒)이 앞서 행인(行人)에게 금족(禁足)지시를 하는지라 스님 한분이 어느 나졸(羅卒)에게 물으니 청국(淸國)으로 가는 사신(使臣)인 동지사(冬至使)가 떠나기에 앞서 선산(先山) 성묘(省墓) 행차(行次)임을 알렸다.   두 스님은 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機會)를 놓칠세라 행차(行次) 길 앞에 닥아가 선듯 부복(俯伏) 합장(合掌)을 함으로 동지사(冬至使)는 의아(疑訝)하여 어인 사연(事緣)인가를 물으니 두 스님은 방성호곡(放聲號哭)을 하면서 다솔사(多率寺) 구원(救援)의 탄원서(嘆願書)를 제출(提出)하였다.   동지사(冬至使)가 탄원문(嘆願文)을 받아 보니 글귀가 한자 한자가 피 눈물로 맺어진 구불(救佛)의 읍소(泣訴)인지라 다 읽자 어느듯 감동(感動)이 되어 그 자리에서 지필묵(紙筆墨)을 내어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써 주며 말하기를 「상감에게는 이 길로 아뢸 것이니 입장(入葬)을 못 하도록 서둘러 내려 가라」지시(指示)하였다.   두 스님은 너무나 뜻 밖의 하회문(下回文)을 받고 백배(百拜) 둔수(頓首) 하면서 하향(下鄕)길을 재촉하였다.   도중(途中) 문경(聞慶) 새재(鳥嶺)에서 우연(偶然)히도 곤양(昆陽)으로 부임(赴任)하는 신관삿도(新官使道)를 만나게 되어 비장(裨將)을 통하여 이런일 있음을 고(告)하니 삿도 또한 부임(赴任) 인사차(人事次) 감사(監司)를 뵈 오려 가는 길이라 쾌(快)히 아뢸 것을 다짐하였다.   신관(新官) 삿도는 대구(大邱) 경상감영(慶尙監營)에 이르러 감사(監司)에게 임지(任地) 보고(報告)를 마친 다음 이 사실(事實)을 말하게 되었다.   듣고 있던 감사(監司)는 대노(大怒)하면서 임지(任地)에 닿기도 전(前)에 직권(職權)을 남용(濫用)하여 상사(上司)를 우롱(愚弄)함은 용서(容恕)할 수 없다 하며 호통을 쳤다 한다.   이때 곤양군수(昆陽郡守)는 옷 소매에서 글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면서 “어명(御命)이요”라고 소리치니 감사(監司)는 혼비백산(魂飛百散)되어 대청(大廳) 아래 꾸러 엎드리니 군수(郡守)는 소리도 드 높혀「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하고 외쳤다 한다.   이리하여 감사(監司)의 헛된 입장(入葬)의 욕망(慾望)을 무산(霧散)시켜 좌절(座折)되었으니 이 두 스님과 명관(名官)의 도움으로 다솔사(多率寺)는 구제(救濟)되었고 사승(寺僧)및 신도(信徒) 모두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불력(佛力)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깨달으며 신심(信心)을 더욱 돈독(敦篤)히 하였다 한다.   후일(後日) 호암(虎岩) 정암(正庵) 두 스님은 불도(佛道)에 정진(精進)하여 이름 있는 대승(大僧)이 되었다 한다.   이로부터 입구(入口) 바위에는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새겼으니 누구도 헛된 야욕(野慾)을 가지는 자(者) 없었다 한다.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는 고종22년 (1885)에 각자(刻字) 되었음으로 이후 다솔사 역내(域內)에는 분묘(墳墓)가 어명(御命)으로 금지(禁止)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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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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