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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6. 옥녀봉(玉女峰)   덕천강(德川江)은 지리산(智異山)에서 원류(源流)로 하여 산청군 하동군 진양군 사천군의 경계를 지으면서 유유히 흘러 강안평야(江岸平野)를 관개(灌漑)하는 물줄기로서 남강(南江)에 합류(合流)하는 강(江)이다. 이 강(江)을 끼고 곤명(昆明) 땅에 높이 솟은 벼랑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옥녀봉(玉女峰)이라 하며 이 봉우리에 얽힌 전설(傳說)은 다음과 같다.   이 봉우리에 옥녀(玉女)라는 아가씨가 살았다. 용모(容貌)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품행(品行)도 단정(端正)하였으며 더욱이 베 짜는데는 남다른 훌륭한 솜씨를 가졌었다. 그녀는 옥녀봉에서 건너편 한복산이란 봉우리에 배(布)를 날아 그 배(布)를 곱게 짜서 덕천강(德川江) 맑은 물에 고히 씻어 완사(浣紗)들 넓은 벌판에 말려 시정(市井)에다 팔아서 먹고 살았다. 이런 사실이 소문(所聞)이 되어 널리 원근(遠近) 마을에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겠금 되었다.   이때 덕천강(德川江) 상류(上流)에 사는 민(閔)도령이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옥녀(玉女)란 아가씨를 보고 아름다움에 그만 혹하여 마음에 크게 결심(決心)을 하고 옥녀(玉女)에게 다가가 평생(平生)을 두고 사랑할 것을 호소(呼訴)하면서 청혼(請婚)을 하였다. 옥녀(玉女)도 지성(知性)이 넘치고 늠늠하고 잘 생긴 민(閔)도령이 싫지는 않았다. 그래서 옥녀(玉女)는 한가지 조건(條件)으로 남아(男兒)의 입지(立志) 관문(關門)인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연후(然後)에 청혼(請婚)을 받아 드린다는 것이다.   민(閔)도령도 이를 쾌(快)히 받아들여 결합(結合)을 굳게 굳게 약속(約束)하였다. 그후 민(閔)도령은 피나는 정력(精力)을 기울고 극기(克己)로서 열심(熱心)히 공부(工夫)를 계속(繼續)하여 마침내 대망(大望)의 과거(科擧) 길을 떠나게 이르렀다.   한편 옥녀(玉女)도 민(閔)도령의 인품(人品)과 의지(意志)를 보아 기어코 급제(及第)할 것을 예견(豫見)하고 환희(歡喜)와 희망(希望) 행복(幸福)한 보금 자리의 꿈을 꾸면서 낭군(郎君)인 민(閔)도령에게 드릴 옷감을 정성(精誠)스럽게 배를 짜기 시작(始作)하였었다.   이무렵 고을 삿도 행차(行次)가 옥녀(玉女)봉을 지나게 되었다. 실(實)은 삿도가 옥녀(玉女)가 미모(美貌)가 뛰어 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 자태(姿態)를 탐내어 보러 오는 길이 었는데 옥녀(玉女)는 이미 민(閔)도령과 혼사(婚事)를 정(定)하여 그 신랑(新郞)의 옷감을 짜는 중이라는 말을 듣고 삿도는 질투를 느껴 감정(感情)을 억제(抑制)하지 못하고 크게 노(怒)하여 요망(要妄)한 계집이 행차(行次)를 어지럽힌다는 구실을 붙혀 삿도는 손수 환도(還刀)를 뽑아 배(布)의 날줄을 무도 잘라 못쓰게 하여 버렸다.   옥녀(玉女)는 이 어처구니 없이 당한 일에 너무나 분(憤)하고 억울한 나머지 낙담하여 “엉엉”울다가 남편될 민(閔)도령을 맞이할 명분(名分)이 없다고 판단(判斷)하고 삿도를 호되게 나무란 뒤 천추(千秋)의 한(恨)을 품고 덕천강(德川江) 물에 몸을 날려 죽고 말았다.   삿도는 이 돌발(突發)한 광경(光景)을 보자 경악(驚愕)의 단말마(斷末魔)적인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피를 토(吐)하고 죽었다 한다.   한편 민(閔)도령은 과거(科擧)에 장원급제(壯元及第)라는 영예(榮譽)를 획득(獲得)하여 의기양양하게 금의환향(錦衣還鄕) 도중 이 기쁨을 사랑하는 옥녀에게 알리고저 먼저 이곳을 찾았다. 와서보니 이미 비참(悲慘)한 최후(最後)를 마친 후였다.   이미 민(閔)도령도 너무나 충격(衝擊)을 받아 일생(一生)을 동거동락(同居同樂)하자고 맹서(盟誓)한 사랑하는 아내될 사람을 다시 찾을 길이 없으니 부귀영화(富貴榮華)가 내게 무슨 소용(所用)있으랴 생각(生覺)하여 옥녀(玉女)를 부르고 부르면서 강물에 투신(投身)하여 일생을 마쳤다 한다.   이 비연(悲戀)이 끝난 이후 이 벼랑밑을 지나는 혼인(婚姻) 행차(行次)는 어김없이 화(禍)를 당하였음으로 금기(禁忌)의 길이 되어 오래동안 신행(新行)길은 멀리 우회(迂回)하여서 다녔다 한다.   주민(住民)들은 옥녀(玉女)의 넋이 어린 이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이라 이름 하고 앞 벌판을 옥녀(玉女)가 비단을 씻고 널었다하여 지명(地名)을 완사(浣紗)라 부르고 있다. 상봉(上峰)에는 옹달샘이 지금도 있으며 옥녀(玉女)가 식수(食水)와 배(布) 짜는 용수(用水)로 썼다 한다.   옥녀봉(玉女峰) 밑은 배 날던 곳이라하여 아무리 강(江)바람이 거세어도 이곳만은 바람끼 없이 잔잔함으로 주민(住民)은 옥녀(玉女)의 혼(魂)이 지금도 서려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또한 한복산에는 배 날던 돌 기둥과 배틀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 구멍이 지금도 역연(歷然)하게 있고 배를 짜서 한복(韓服)을 마련한다는 뜻에서 한복산(韓服山)이고 산허리에 열두골이 있어 열두폭 치마를 상징함이라 전해 오고 있다. 그리고 덕천강(德川江)의 교통수단(交通手段)인 완사(浣紗) 금성(金城)의 나룻배는 천년이 넘도록 옥녀봉(玉女峰) 밑 나루터에서 강폭(江幅)을 오고가고 함이 배(布)를 짜는데 북(씨날)으로써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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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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