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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5. 백마산(白馬山)과 소장군(蘇將軍)   삼정리(三亭里) 답동(塔洞) 방광동(放光洞) 뒤에 높다란 능선(陵線)이 있어 이름을 백마산(白馬山)이라하니 주위(周邊)에 얽킨 전설(傳說)같고 사실(事實) 같은 사연(事緣) 등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신라(新羅) 쇠운(衰運)이 막다른 말기(末期)의 시절(時節), 지금은 하동군(河東郡) 옥종(玉宗)땅이지만 삼정리(三亭里)에서 5리(里) 상거(相距)의 산봉(山峰)에 승랑당(僧郞堂) 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당시 이 절(寺)에는 많은 승려(僧侶)의 무예(武藝)를 소장군(蘇將軍) 이 정열(情熱)을 다하여 연마(練磨)시키고 있었다. 이 소장군(蘇將軍)은 10척이 넘는 장신(長身)에 발이 석자(三尺)나 되었다 하며 무예(武藝)도 타(他)의 추종(追從)이 될 수 없이 출중(出衆)하였고 또 힘이 초한(楚漢)시대의 항우(項羽)를 능가하는 역사(力士)였다.

  소장군(蘇將軍)은 신라(新羅)의 국운(國運)이 다 됨을 틈타 천하(天下)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심(野心)으로 그 절에서 무승(武僧)을 양성(養成)하고 있는 것이 였다.   힘이 무르익어갈 어느날 홀연(忽然)히 백마(白馬) 한 마리가 산문(山門) 밖에서 길게 울고 있음으로 장군(將軍)이 나가보니 처음보는 명마(名馬)라 말을 힘껏 포응하고 갈기를 쓰다 듬으며 “나의 웅지(雄志)를 너는 아느냐?”물으니 말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將軍)은 번듯 말에 올라 한번 채찍을 치니 눈깜짝할 사아에 탑골 뒷산에 닿는 것이었다.   장군(將軍)은 천운(天運)이 자기에게 온 것이라 굳게 믿고 조련(操練)시킨 무승(武僧)들에게 천하정벌(天下征伐)의 장도(壯途)에 오를것을 선언(宣言)하였다. 그리하여 삼정리(三亭里) 뒷산에 제단(祭壇)을 모아 천신(天神)에게 제사(祭祀)를 지낸 다음 애마(愛馬)에게 이르기를 “내가 활을 쏘는데 화살이 떨어지기 전(前)에 네가 닿으면 나는 천하(天下)를 제패(制覇)할 것이고 네가 뒤에 닿으면 나의 뜻이 이룩될 수 없으니 너는 내 칼에 죽음을 받아야 한다.” 하였다. 그 말을 마치자 넓다란 바위 위에서 혼신(渾身)의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니 활살(矢)은 유성(流星)같은 섬광(閃光)을 발(發)하면서 서쪽으로 날아갔다. 이와 동시 백마(白馬)는 장군(將軍)을 태우고 질풍(疾風)같이 달리니 그 빠름이 관운장(關雲長)의 적토마(赤兎馬)도 상대(相對)안될 정도(程度)였다. 어느덧 말이 고개에 웃뚝섯다. 장군(將軍)은 말에서 내려 아무리 보아도 활살은 날아오지 않으니 크게 한숨 지으면서 “하늘은 내게 대운(大運)을 주지 않는구나” 하면서 칼을 뽑아 사랑하는 백마(白馬)의 목을 내리쳤다.   말목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공중(空中)에서 시윗소리가 나며 그때서야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장군(將軍)은 자신(自身)의 너무나 경거망동(輕擧妄動)함에 크게 뉘우친들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늘이 소장군(蘇將軍)에게 큰 뜻을 세워라고 운(運)을 주었건만 순간의 판단착오(判斷錯誤)로 대사(大事)를 그르친 것이었다. 정신(精神)을 돌이킨 장군(將軍)은 말을 후히 장사(葬事)지내고 승랑당(僧郞堂)으로 돌아와 무승(武僧)들과 함께 흔적없이 사라졌다 한다. 이런일이 있은 뒤에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하였다 하며 그 뒷날 소장군(蘇將軍)은 말 무덤 옆에 와서 죽었다 하며 지금도 소장군(蘇將軍)무덤이라 전(傳)해지고 있다.   후인(後人)들은 삼정리(三亭里) 뒷산을 백마산(白馬山)이라 일컬어 주고 제단(祭壇)의 흔적(痕跡)이 산봉(山峰)에 남아 있으며 장군(將軍)의 활을 쏘았다는 바위에 삼척(三尺)의 발자욱이 역력히 찍혀있어 세인(世人)은 “장군(將軍) 발터”바위라 한다.   그리고 장군(將軍)의 활살이 빛을 내면서 지냈다 하여 이 마을을 방광(放光)이라고 호칭(呼稱)하고 활살이 떨어진 곳을 화살고개 또는 살(矢)고개라고 한다.   화살고개 밑에 큰 말 무덤이 50년전까지 전설(傳說)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호리꾼들이 파 헤쳐 그곳에서 오래된 말안장과 말굽신이 나온 것을 촌노(村老)는 보았다 한다.   승랑당(僧郞堂) 절터의 산을 지금도 “고시랑당”산(古僧郎堂)이라 부르는 것은 한문(漢文)으로 古僧郞堂(고승랑당)에서 유래(由來)된 것이라 한다.   90여년전 이 고시랑당 산은 갑오(甲午) 민란시(民亂時) 동학군(東學軍)의 영남(嶺南) 본거지(本據地)였고 관군(官軍)과의 대격전지(大激戰地)로서 사기(史記)에 이름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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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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