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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4. 상사(想思) 바위   본촌리(本村里)는 곤명(昆明)의 북단(北端)에 위치하고 있다. 오래전(前)부터 곤명(昆明)이라는 동명(洞名)이 였는데 곤명현(昆明縣)의 소재지(所在地)였기에 본촌(本村)이라는 이름이 이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큰 마을이 무당골이고 등넘어 서재(書齊)골이 있다. 서재골 위쪽에 한평(坪) 남짓한 평평한 바위가 있으니 이 바위를 “상사(想思)바위”라고 하는데, 그 유래(由來)는 다음과 같다.   무당골(巫堂)에 가세(家勢)가 넉넉한 한 무녀(巫女)가 살았는데 외동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총명(聰明)한데다 얼굴도 잘 생겨 이름을 “예쁜이”라 하였다. 어느듯 18세의 아릿다운 아가씨가 되었으나 동네 사람들은 무녀(巫女)의 몸에서 태어난 것을 아깝게 여겼다. 같은 나이 또래인 윤(尹)도령은 아랫마을 윤(尹) 부자(富者)의 독신(獨身) 아들이다. 재산(財産)있는 명문(名門)인지라 고이자라 귀공자(貴公子)로서 손색(遜色)이 없고 글 공부도 잘 하였었다. 큰마을 서당(書堂)길은 언제나 무당(巫堂)골을 지나야 하는데 예쁜이는 날마다 집앞을 지나는 이 미소년(美少年)인 윤(尹)도령에게 어느듯 마음으로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윤(尹)도령은 양반(兩班)에다가 부자(富者)집 외아들이니 언감 생심 천인(賤人)으로 하대(下待)받는 무당(巫堂)의 딸 하고는 혼인(婚姻)의 대상(對象)이 될 수 없었다.   예쁜이는 사모(思慕)하는 정(情)은 날이 갈수록 더하여 억누를수 없어 어느날 글방에서 돌아가는 윤(尹)도령에게 다가 서서 사랑을 고백(告白)하였다. 그러나 평소(平素) 마음에도 없었던 윤(尹)도령이었기에 구애(求愛)를 거절(拒絶)하며 돌아 보지도 않고 지나가 버렸다.   이날부터 예쁜이는 상사(相思)병이 들어 크게 앓다가 며칠뒤 가슴에 한(恨)을 안은채 윤(尹)도령을 부르면서 숨을 거두었다. 예쁜이가 죽은 며칠후 윤(尹)도령은 자기몸이 써늘함을 느껴 깨어보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큰 뱀이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라 고함을 질러 부모(父母)와 가속(家屬)이 달려와 보니 무시무시한 꼴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예쁜이는 죽어서도 윤(尹)도령을 못잊어 뱀으로 화(化)하여 사랑하는 애인(愛人)을 포옹하는 것이었다.   가속(家屬)들이 달라들어 뱀을 뗄라하여도 떨어지지 않았고 손을 대면 댈수록 더 쪼여 지는 것이었다.   도령이 하는 수 없이 뱀의 몸둥이를 쓰다듬어 주니 몸을 풀어주기는 하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부자(富者)집에서는 경(經)도 읽고 부적(符籍)을 부치며 굿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으나 효험이 닿지않아 뱀을 땔 길이 없었다.   윤(尹) 도령은 그날부터 서당(書堂)에도 못가고 친구와도 만날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럭저럭 방(房)에 갇혀있다가 하루는 답답하여 학우(學友)들과 자주 놀았던 서당(書堂) 윗쪽 넓은 바위에 바람 쐬려갔다.   한편 뱀이된 예쁜이는 사람과 미물(微物)은 같이 동거(同居)할 수 없음을 아는지라 다시는 헤여저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하여 온갖 힘을 다하여 도령을 감고서 백척(百尺)이 넘는 높은 벼랑에서 내딩굴어 물속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한다.   이 일이 있은 뒤 후세(後世)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相思)바위라 부르게 되었고 벼랑 밑 깊은 물은 용(龍) 쏘(沼)라하여 지금도 물이 소용돌이쳐 흐르니 사람들이 접근(接近)함을 두려워하고 있다 한다.   독신(獨身) 아들이 죽은 윤부자(尹富者)는 흔적없이 망하여 버렸는데 오늘까지 이동네 이름이 “장자터”라 불리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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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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