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2. 곤젖고개   곤명완사(昆明浣紗)에서 서쪽으로 가는 국도(國道)에 조그마한 고개가 있으니 이름을 곤젖고개라 한다.   옛날에는 이 고개이름이 연젖고개였다고 하니 그 사연(事緣)은 다음과 같다.   고려(高麗)말에 연젖고개 밑에 한 부자(富者)가 살았다. 사람됨이 인색하고 자신(自身)의 이익(利益)에는 어떠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뿐 아니라 남의 희생(犧牲)도 아랑곳 하지 않으므로 원근주민(遠近住民)으로부터 원망(怨望)이 뒤따르는 인물(人物)이었다. 이 사람이 친상(親喪)을 당(當)하였다. 명당(名堂)자리를 구(求)하려고 많은 풍수지사(風水地師)를 초빙(招聘)하여 좋은 자리를 물색중(物色中) 어느날 홀연(忽然)히 한 도사(道師)가 나타나 유택(幽宅)을 잡았는데 이름 하여 유두출지(乳頭出地)였다.   누구가 보아도 과연(果然) 명당(名堂)자리로 보임으로 부자(富者)는 이 자리를 택(擇)하여 장례(葬禮)를 성대히 치루었다. 삼우(三虞)가 지나 도사(道師)가 떠나려고 하는데도 노자(路資)한푼 안주며 하는말이 명당(名堂)이라면 곧 영험(靈驗)이 나타날 것인즉 일년후에 오면 사례(謝禮)를 할터이니 그때 다시 오라하였다.   그러자 도사(道師)는 말없이 총총히 떠났다가 1년 뒤에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이 부자(富者)는 도사(道師)에게 아직껏 영험(靈驗)이 없으니 산운(山運)이 돌아올때까지는 사례(謝禮)할 수 없다고 하며 하루밤 쉬고 가자는 청(請)도 거절(拒絶)하며 밥한끼 대접도 없이 축출(逐出)하고 말았다. 도사(道師)가 어찌 이 자(者)의 인색함을 모르랴 말없이 그 집을 나와 연젖고개에서 자리를 마련하고 앉아서 그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에게 한푼씩 돈(銭)을 주며 이 고개이름은 연젖고개가 아니고 곤젖고개라고 불러 달라고 부탁 하면서 자기가 갖고있는 백양돈을 다 나누어 주었다 한다. 뒤 늦게 이를 알아차린 부자(富者)는 고개이름을 연젖고개로 돌릴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이미 잃은 인심(人心)을 돌릴 수 없어 끝내 곤젖(젖통이 골았으므로 젖이 나오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개가 오늘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뒤 이 부자(富者)는 재산(財産)도 망하고 사람도 망하여 흔적도 없이 살아졌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로부터 몇 백년이 지난후 금성(金城)의 합천이씨(陜川李氏)가 이 터를 잡아 선영(先塋)을 입산(入山)시키니 과연 명지(名地)로서 후손이 수백호로써 크게 번성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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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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