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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1. 다솔사(多率寺) (1) 개황(槪況) 1) 소재지 : 사천군 곤명면 용산리 산 86번지 본사(本寺)외 산내암자(山內庵子) 봉일암(奉日庵) 보안암(普安庵) (일명 미륵암(彌勒庵)) 서봉암(棲鳳庵) 2) 경상남도 지정(指定) 문화재(文化財)

문화재명지정번호지정일
다솔사 대양루(大陽樓)유형문화재 제89호1974. 2. 16
다솔사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유형문화재 제39호1972. 2. 12
다솔사 극란전(極樂殿)문화재재료 제148호1985. 11. 14
다솔사 웅진전(應眞殿)문화재자료 제149호1985. 11. 14
(2) 연혁(沿革)   1) 서기 503년 (신라 智證 4年 癸末) 영악대사(靈嶽大師)가 창건(創建) 하고 사명(寺名)을 영악사(靈嶽寺)라 함   일설(一說)은 범승(梵僧인도승) 연기조사(緣起祖師)의 창건(創建) 설이 있다.   2) 서기 636년 (신라 선덕왕 5년 丙申)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이창(二創)하고 사명(寺名)을 타솔사(陀率寺)로 개칭(改稱)하다.   3) 서기676년(신라 문무왕 16년 丙子) 원교국사(圓敎國師) 의상(義湘)이 삼창(三倉)하고 사명(寺名)을 영봉사(靈鳳寺)라 개칭(改稱)하다.   4) 서기 861~885년 신라 경문왕(景文王)과 헌강왕(憲康王) 사이에 도선대사(道詵大師) 요공(了空)이 사창(四創)하고 사명(寺名)을 그대로 두었다 하였으니 여기에 고찰(考察) 할 것은 도선사(道詵師)는 당세(當世) 풍수학(風水學)의 권위자(權威者)었음을 볼적에 사찰지형(寺刹地形)이 장군대좌(將軍對座)와 삼성오현지지(三聖五賢之地)로 하였다 하니 다솔사(多率寺) 명칭(名稱)이 도선사(道詵師)가 많이 거느린다는 뜻에서 명명(命名) 한 것이 아닌가 추정(推定)된다.   5) 서기 1352~1374년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왕사(王師)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오창(五倉) 하고   6) 서기 1592년 조선(朝鮮) 선조(宣祖)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當時)에 절의 반부(半部)가 병화(兵火)로 소실(燒失)되고   7) 서기 1686년 조선 숙종 12년 丙寅 신양자(神陽子) 영일(靈日)과 곤봉자(昆峯子) 혜능(惠能) 사연(思衍) 과 주지(住持) 자청(自請)등 사도인(四道人)이 복구(復舊)하니 이것이 육창(六創)이다.   8) 서기 1704년 조선 숙종30년(甲申) 9월 계파대사(桂坡大師) 성능(性能)이 지이산(智異山) 영악사(靈嶽寺) 사적비(寺跡碑)를 건립(建立)하다.   9) 서기 1748년 영조(英祖) 24년 소진(燒盡)되어 호익대사(好益大師) 진안(震顔)이 칠창(七創)하고   10) 서기 1885년 고종(高宗) 22년 을유(乙酉)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봉명산(鳳鳴山) 아래에 선영(先塋) 입산(入山)을 하려하자 사승(寺僧)의 상소(上疎)에 조명(詔命)으로 금지(禁止) 시켰으니 지금도 경내(境內) 입구(入口) 큰바위에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각자(刻字)가 되어 있다.   11) 서기 1914년(甲寅)12월 7일 야반(夜半)에 발화(發火)하여 대강당(大講堂) 유천희해루(遊天戱海樓) 이외(以外)는 소진(燒盡) 되었더니 주지(住持) 월초대사(月蕉大師)와 신도(信徒)들이 진심갈력(盡心竭力)하여 대웅전(大雄殿)과 라한전(羅漢殿)을 복구(復舊)하니 이것이 팔창(八創)이다.   12) 서기 1933년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김범부(金凡夫) 김법린(金法麟)등 독립지사(獨立志士)는 만당(卍黨) 결사본부(結社本部)를 서울에서 일경(日警) 감시를 피해 다솔사로 옮겼다. 이무렵 독립운동자금(獨立運動資金) 조달기관(調達機關)인 백상상회(白山商會)의 연락처(連絡處)가 다솔사였다.   13) 서기 1960년 주지(住持) 지원(智元:원명 李元九)이 대양루(大陽樓)를 번와(飜瓦) 하였다.   14) 서기 1979년 주지 박한남에 의해 석가존(釋迦尊)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발견(發見) 되었고   15) 서기 1982년 주지 화봉(華峯)의 노력과 신도회장 정원호(鄭元鎬)의 시주로 사리탑(舍利塔)을 건립(建立)하고 도괴직전(倒壞直前)의 대웅전(大雄殿)과 승당노전(僧堂爐殿)을 중창(重創) 하였으니 구창(九創)이다.   16) 현 주지 박혜운(朴慧耘)이 대웅전(大雄殿) 단청(丹靑)과 부속 요사(療舍) 중건(重建)에 경력(傾力)하여 사찰의 면모(面貌)가 새롭게 되었다.

(3) 다솔사(多率寺)의 발자취   • 다솔사에 관한 사료(史料)로서는 1705년(숙종31년)에 세워진 영악사(靈嶽寺) 중건비(重建碑)가 있고 이것 외에는1762년(영조)에 쓰여진 다솔사 명부전(冥府殿) 대양루(大陽樓) 사천문(四天門) 중건기(重建記)   • 1779년 (정조3년)에 겸암(鏡岩)이 쓴 다솔사팔상전중수기(多率寺八相殿重修記)의 두 기록(記錄)이 참고된다. 그러나 채팽윤(蔡彭胤)이 지은 영악사중건비(靈嶽寺重建碑)에 나타나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이전(以前)의 기록은 다솔사가 임란병화(壬辰兵火)에 불탄후 100여년이 지난 뒤에 쓰여진 기록임으로 사적(事蹟)을 믿기에는 의문(疑問)이 가나 현재로서는 이 비문(碑文)의 기록에 의지(依持)할 수 밖에 없다.   영악사중건비문(靈嶽寺重建碑文)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智證王) 12년(511)에 이 절이 창건(創建)되었고 그 최초(最初)의 절이름은 영악사(靈嶽寺)이다.   • 636년(선덕왕5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수(重修)하고 타솔사(陀率寺)라 했다.   • 그후 의상조사(義湘祖師)가 문무왕 16년(676)에 세 번째로 중수(重修)하고 다시 영봉사(靈鳳寺)라 했다.   • 신라말(新羅末)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重修)하고 다시 영악사(靈嶽寺)라 했으며   • 고려(高麗)말에는 나옹(懶翁)스님이 중수(重修)했다.   • 다솔사팔상전중수기(多率寺八相殿重修記)에는 창건주(創建主)를 지영(智英)이라고 했다. 또는 흔히들 연기조사(緣起祖師)의 창건(創建)이라 하기도 한다.   최근까지 연기(緣起)는 매우 전설적(傳說的)인 인물로 밝혀저 있지만 최근에 발견된 신라(新羅) 화엄경(華嚴經)의 발문(跋文)에 의해 그의 활동년대(活動年代)가 밝혀졌다. 즉 그는 8세기 중엽 황용사(皇龍寺)의 승려로 화엄종(華嚴宗)의 고승(高僧)이다. 만약 연기(緣起)가 다솔사의 창건주(創建主)라면 이 절의 창건시대는 8세기(700년대)중엽 이후가 되어야 한다. 이와같이 절 이름이 중수(重修)때마다 바뀌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1705년의 기록까지는 영악사(靈嶽寺)로 나타나는데 1761년의 기록부터는 분명히 다솔사 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1758년에 월증(越徴) 일진(日眞) 일휘(日輝)등이 중수(重修)한뒤 다솔사(多率寺)로 했다는 다솔사명부전(多率寺冥府殿) 대양루사천문중건기(大陽樓四天門重建記)의 기록은 거의 확실하다.   절 이름인 다솔(多率)에 대하여는 이 절에 소나무가 많기 때문이라는 등의 해석이 있지만 위의 기록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절의 주산(主山)이 마치 대장군(大將軍)이 앉아있는 듯 하기에 많이 거느린다는 의미의 다솔(多率)이란 것도 확실(確實)하다. 지리풍수학설(地理風水學說)로 말하면 다솔사의 위치(位置)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둘러쌓인 장군대좌(將軍大座)설이고 우백호(右白虎)의 위치에는 대장군 의 명(命)에 의하여 많은 병사(兵士)를 지휘(指揮)하는 북(鼓) 바위가 지금도 능선(稜線) 평평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능선 아래에 병사(兵士)를 주둔(駐屯)시킨 “군골”이라는 지명(地名)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워보아 많은 병사를 거느린다는 뜻에서 다솔(多率)이라 한 것으로 믿어진다.   지리적(地理的)으로 이조(李朝)때 왜구의 침탈(侵奪)이 남해안(南海岸)에 극심(極甚)하였기로 승병(僧兵)의 역할도 있었다는 설도 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의 병화(兵火)로 이절은 폐허화 되었고 그로부터 96년이 지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1686년(숙종12년)에 신양자(神陽子) 영일(靈日)등의 사대사(四大師)와 10년 세월에 걸처 중수불사(重修佛事)를 하여 3개의 전(殿) 6개의 당(堂) 5개의 각(閣) 1개의 요(療)등 많은 건물을 세워 중흥(中興)했다. 이로부터 60년이 지나 1748년 (영조24년) 제야에 실화(失火)로 삼전(三殿)과 오당(五堂)이 불타는 재앙(災殃)이 있었다. 호익(好益) 진안(震顔)등이 이듬해에 그 약간을 복구했다.   명부전(冥府殿)과 대양루(大陽樓) 그리고 사천문(四天門) 등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758년(영조34년)에 월증(越徵) 일진(日眞) 일휘(日輝)등이 중건(重建)했다.   이층(二層) 맛 뱃집으로 건평 106평의 규모(規模)나 되는 대양루(大陽樓)는 현재까지 그대로 전(傳)해져 지금은 지방유형문화재(文化財) 제83호로 보존되고 있으며, 1779년(정조1년)에 전 주지 일휘민단(日輝敏坦)이 팔상전(八相殿)을 중수(重修)했다. 1748년에 불탄 이후 약30년이 지나서야 복구(復舊)된 셈인데 당시의 중수(重修) 사실을 경암(鏡岩)이 기록(記錄)해서 전(傳)하고 있다.     1914년 또 한번의 화재(火災)로 대양루(大陽樓)를 제외한 모든 건물(建物)이 소실(燒失)되자 그 이듬해부터 주지 월초(越蕉)를 중심으로 3년간에 걸쳐 복구(復舊)되었다. 약 106평의 대웅전(大雄殿)을 중심으로 나한전(羅漢殿) 명부전(冥府殿) 노전(爐殿) 서쪽에 기역(ㄱ)자로 된 승당(僧堂) 동쪽에 기역(ㄱ)자로 된 선당(禪堂) 앞쪽에 대양루(大陽樓)등 규모(規模)로 최근까지 전(傳)해 왔으며, 최근 효당(曉堂)에 의(依)해서 사찰(寺刹)주위 조경(造景)를 이루웠고 대웅전(大雄殿) 현판(懸板)을 추사(秋史)의 유천희해(遊天戱海)를 한때 걸기도 하였다.   1960년 주지 지원(智元)이 누수(漏水)되는 대양루(大陽樓)를 번와(飜瓦)하였다.   1980년 대웅전(大雄殿)의 건물이 폭우(暴雨)로 기울고 승당(僧堂)도 퇴락되여 도괴(倒壞)의 위험이 있음으로 1982년 주지 화봉(華峯) 신도회장 정원호(鄭元鎬)가 중심이 되어 도게 직전(直前)의 대웅전(大雄殿)과 승당(僧堂) 그리고 노전(爐殿)을 헐어내고 30평의 현 적멸보궁(寂滅寶宮)과 진신사리탑(眞身舍利塔) 노전(爐殿)을 중건하던 중 주지 화봉(華峯)은 과로(過勞)로 인하여 열반(涅槃)하고 현주지인 혜운(慧耘) 총무 원천등과 합심(合心)하여 중수불사(重修佛事)가 완공되었고   1986년 대양루(大陽樓)는 국비(國費) 6,000만원으로 복원(復元)되었다.   ※ 편집자 주(註)   여기 수록(收錄)된 다솔사의 발자취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기까지 오랫동안 효당(曉堂)에 사사(師事)하였고 한국 불교 문학에 정진(精進)하고 있는 정원호(鄭元鎬)의 기고(寄稿)를 준기(準記)한 것이다.

(4) 다솔사적비번역문(多率寺跡碑飜譯文)   조선국(朝鮮國) 경상우도곤양북(慶尙右道昆陽北) 지리산(智異山) 영악사중건비(靈嶽寺重建碑) 선무랑전수(宣務郞前守) 사간원(司諫院) 정언제교(正言製敎) 채팽윤(蔡彭胤) 찬(撰 - 지음) 가선대부(嘉善大夫) 전 함경도관찰사(前咸鏡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함흥부윤(巡察使咸興府尹) 이진휴(李震休) 서(書 一씀) 가선대부(嘉善大夫) 원임사헌부(原任司憲府) 대사헌(大司憲) 권규(權珪) 전(篆一 씀)   곤명지방(昆明地方)의 남쪽은 바다에 접극(接極)하고 그에 진좌(鎭坐)한 산(山)은 지이산(智異山)으로서 그 산맥(山脈)이 파장(波狀)을 짓고 구름속에 높이 솟았으며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의 아홉고을에 걸치어 수 백리(百里)에 긍(亘)하고 있다.   이와같은 산맥(山脈) 가운데 곤양(昆陽)의 북쪽에 있는 봉(峰) 이름을 봉명(鳳鳴)이라하고 이 봉명산은(鳳鳴山)의 봉일암(鳳日庵)을 따라 남으로 이리(二里)가량 되는 곳에서 오른편을 돌아보면 청학대(靑鶴臺)와 순용정(循涌井)이 있고 그리고 동편에는 석문(石門)이 있어 마치 세사람이 서고 앉고하여 있는 것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전설(傳說)로는 신라(新羅)때 최고운선생(崔孤雲先生) (문창 文昌)이 지영(智英) 능민(能敏) 두 스님과 함께 이 지역(地域)을 즐기던 곳이라 한다. 그리하여 이곳에 있는 이 절이 건립(建立) 되기로는 서기503년《양천감(梁天監)2년 : 신라지증왕(智證王) 4년 계미(癸未)》에 영악대사(靈嶽大師)가 비로소 창립(創立) 하였으며 처음 이름은 영악사(靈嶽寺)라 하였다.   두 번째 서기 636년 《당정관(唐貞觀)10년 신라선덕왕 5년 병신(丙申)》에 재창(再唱)하고 사명(寺名)을 타솔사(陀率寺)라 하였으며,   세 번째에 서기 676년 《당의봉(唐儀鳳)원년 신라문무왕(文武王) 16년 병자(丙子)》에 원교대사(圓敎大師) 의상(義湘)이 삼창(三倉)하여 절 이름을 영봉사(靈鳳寺)라 고쳤으며,   네 번째에 도선대사(道詵大師) 요공(了空)이 지금 이름으로 사창(四創) 하였으니 이것이 서기 860년으로부터 동879년간(間)의 일이었으니 우리 신라(新羅)로 말하면 경문왕(景文王)과 헌강왕(憲康王)의 사이에 해당(該當)된다.   다섯 번째로 고려말(高麗末) 공민왕(恭愍王)의 왕사(王師) 보제존자(普濟尊者) 혜근(慧勤)이 이 절을 크게 넓히고 번창(繁昌)케 하였는데 이시기는 서기 1352년부터 1374년 동안의 일이다. 그리하여 오던 절이 서기 1592년 선조(宣祖)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이 절의 약 반이 병화(兵火)로 인하여 소실(燒失) 되었으며, 서기1686년 숙종(肅宗)12년 병인(丙寅)에 신양자(神陽子) 영일(靈日)과 곤봉자(昆峯字) 혜능(惠能) 과 사연(思衍)과 주지 자청(自淸) 네 도인(道人)이 남방(南方)의 훌륭한 종사(宗寺)로서 이곳을 살펴보고 탄식(嘆息)하여 갈오되 이곳은 영성(靈聖)한 구역(區域)이다. 그러므로 “첫째에 영악대사(靈嶽大師)가 창건(創建)한 후 계속하기를 140년에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있었고 그뒤 40년에 원교대사(圓敎大師)가 있었으며 그뒤에 요공대사(了空大師)가 있었으며 다시 400년후에 보제존자(普濟尊者)가 있었고 그뒤 200년 가까이 가서 임진병란(壬辰倭亂)이 있었고 임진병난 후로 이 절을 유독히 거냥 폐허(癈虛)에만 두고 있겠는가 이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원력(原力)을 같이하여 널리 모든 시주(施主)를 모아 약 10년 동안에 그 큰 공(功)이 완수 되었으니 대략을 말하면 법당이 셋이요 각(閣)이 여섯이요 요사(療舍)가 삼동(三棟)이오 낭루(廊樓)가 일동(一棟)으로써 이에 다시 두문(門)이 설립되었으니 그 문(門) 이름은 하나는 천왕문(天王門)이요 또 다른 하나는 증산문(增山門)이라 한다. 이와같이 골짜기 비좁을 만치의 규모(規模)로 회복되었다. 이 같은 중창(重創)의 공로(功勞)를 말하자면 개산(開山) 최초의 공(功)에 못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내가 옛 기록을 보았는데 그에는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중국(中國)에 들어가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신(化身)을 천견(親見)하게 되었고 그 문수화신(文殊化身)으로부터 신구(信具)로써 전부(傳部)를 받았으며 이에 덧부쳐 문수(文殊)로 부터”자네의 나라를 삼한국(三韓國)은 서로 전쟁(戰爭)하기를 날로 일삼으니 참으로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싸움을 없애고 국토(國土)를 오래 보전하는 데에는 부처님의 영험없이는 안된다. 그리고 남쪽에 못이 있어 그 못안에 독한 용(龍)이 독기(毒氣)를 품고 서리어 있으니 그 용의 항복(降伏)을 받은 뒤라야 그 같은 전화(戰禍)가 끝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도선(道詵)이 서(西)에 가서 일행선사(一行禪師)에게 배울 때에 일행선사(一行禪師)는 우리나라 산수도경(山水圖經)을 가져다 가르켜 보히면서 ”너의 나라인 동방(東方)의 땅은 마치 전쟁(戰爭)하는 터이다 사람에 비(比)하면 병(病)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병(病)이 있는 때에는 그 신체(身體)의 맥(脈)을 보아 그 혈맥(血脈)에 침(針)을 놓아야 하는 법(法)이다. 그러므로 너의 나라는 이 지맥(地脈)을 따라 적당한 곳에 가람(伽藍)을 지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하여 ”도선(道詵)의 지도를 받은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나라 가운데 가람(伽藍)으로써 3500이 정(定)하여졌는데 절(寺)도 통도사(通度寺)와 화엄사(華嚴寺)와 같이 그 수에 들게 된것이며 실지로는 이 절이 그가 원(願)하는 바로서 이루어졌다“한다.   지리산(智異山)으로 말하면 천하(天下)의 신산(神山)이오 사대사(四大師)로 말하면 불교(佛敎)의 조리(祖理)는 종사(宗寺)이다. 이 같은 분의 유서를 더욱 포개고 영장(靈場)을 보축(補蓄)하여 잔결(殘缺)을 그 뉘라서 도모하지 않으랴.   그런데 이 사도인(四道人)같은 이로 말하면 더 말할 것도 없이 그 법통(法通)을 이어나갈 후계자의 사명으로써 이 같은 도장(道場)을 중창(重創) 대성(大成)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인(四道人)의 건설(建設)로 말하면 그 비용(費用)이 다 국가 기관인 관(官)에서 나왔었고 집권자(執權者)들이 감독 하였으나 지금 이 사도인(四道人)들로 말하면 한갖 자기들의 지성스런 마음에 맹서하여 영세한 일반 인민의 정성을 모아야 하는 그 고행(苦行)을 말하면 이미 이 절이 이뤄진 뒤에는 지금까지 해이(解弛)하였던 불교도(佛敎道) 계률(戒律)을 바로잡아 세웠으며 참선과 교리(敎理)를 중흥(中興)하는 도풍(道風)을 일으켰으며 삼도인(三道人)은 그 사업을 도왔다.   이상으로써 이 절의 내력(來歷)의 줄거리를 대략 다 기술(記述)하였다. 그리고 계파대사(桂坡大師) 성능(性能)이 이를 위하여 장육전(丈六殿)에 대한 글을 이미 쓴 일이 있다. 그리고 이일에 종사함을 알고 마음 좋이 여겨 게을리 하여 글을 안 쓸수가 없으므로 사도인(四道人)의 공을 아름답게 여겨 이에 그 명(銘)을 쓰노라.   두류산(頭流山)은 하늘이 만든 것이라 우리나라 남해(南海)의 울이 되었고 이 절은 불교(佛敎)의 도장(道場)이라 신라(新羅)때부터 으뜸가는 절이로다 나 그 개산(開山)의 유래(由來)를 상고하니 영악(靈嶽)스님이 제일 먼저요.   자장(慈藏)스님이요   다음은 원교국사(圓敎國師)   그 다음은 도선(道)詵이요   그 다음에는 혜근(慧勤)일레라   지혜(知慧)스럽게 빛나는 법(法)의 천이백년(千二百年) 면면(綿綿)히 우리들 강산(江山)에 변난(變亂)이 왔으니 그것은 바다를 휩쓸은 왜적(倭賊)의 떼라.   금성(金城) 땅(이지방의 옛이름)에 연기(兵火를 말함)가 일었다. 되놈의 한 그릇이요 되놈이 달려간 소치(所致)이다.   빈터에 늙은 스님이 그 동지와 오락가락 하면서 그 사실(事實)을 밝히고 이 갈피의 연(緣)을 설명(說明)하니 건재(建材)는 서고 석가래는 달리니 우뚝한 절이되고 빛나는 단청을 이었다.   복(福)스러운 집이 완전(完全)히 회복되니, 그가 빛나고 좋은 도장(道場)이 된다.   긴 세월에 비하면 아침 이슬이나 저녁 노을 같은 것이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전(傳)함에 거룩한 사업은 늘어만 나고 때 아닌 재화는 있어도 진리(眞理)의 등불은 길이 빛나리   강희(康熙) 43년 (1704) 갑신(甲申) 9월 일입(立)   행군수(行郡守) 통정대부(通政大夫)   황 규(黃奎)

조선국경상우도곤양군북지리산영악사중건비 선무랑전수사간원정언지제교 채팽윤찬가선대부전함경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함흥부윤 이진휴 서 가선대부원임사헌부대사헌 권규전 곤명남극우해기진왈지리지산파분운촉면긍이도구군수백리직곤지북기봉왈봉명요봉봉일암절이남가이리소우고청학대순용정이동석문초수숭어인삼지상전최문창여지영능민이석자반선이락지자야이사지실자량천감이년신라지증왕계미시명왈영악재신어자장법사이위타율사즉당정관지십년선덕왕병신야삼신어원교대사의상이위령봉즉의봉지원문무왕병자야사신어료공대사도복위금명즉함통건부지제이경문헌강지간야월 원지계려공민왕사 보제전자혜근증이대지시위오전월아임진지온화기반성상지십이년병인 신양자영일곤봉자혜능사연주지자청사도인이남종지수옹석이래䪱이탄왈차비영성지구야기아초조부해지세침침경침독사십년이유자장사십년이유원교이백년이유료공사백년이유 보제이백년이화화차금백유육십유오년의기독무유호어시합지동원광집제단범역십한서이대공이완개위전삼위당육각삼료일랑이협기문자이총이문지왈천왕증산일곡실복구관기잔제수곽지공불시여측금개산자의상람고기자장지입어중국야견문수화신어종남지운제사즉이신구부지왈삼한일심우과모예전학불지영불제필남추단이독용복연후기재기의급료공지서학어일행야행취아산수도경지시지왈동방지지세고전장야비인유병절맥이참석지가야시칙추국중이위가람지소자삼천오백이시사야여통도화엄후선기비선보지술지소유흥야칙무론기지이천하지신산야사대사산문지조종야류연축영이잔결불도약사도인자기불성법윤지당구재황사대사지시비개출현관왕인동지금사도인도이서심고행적수촌지미이성지시우난야신양자기신기사칙거추이지계율흥선송지유풍삼도인여우익언파소이탁쇄지기진기계파대사성능찬차본말이사도인성송여문여상위능이문상장육전지역의감기종사선승불태차가사도인지공수위지명왈두류조천남해지인부도궁언라락궐전아구개록영악실선유 자유 원근후선전혜서면면천이백년성황교선환해병전금지양연내이내건의궐노선율래연편재춘주선재소재견열란업연무울홍선복사복전하궤기병광세비견여조모연심심상전승업시연겁화수연지등장현 강희사십삼년갑신구월 일립 행군수 통정대부 황 규 朝鮮國慶尙右道昆陽郡北智異山靈嶽寺重建碑 宣務郞前守司諫院正言知製敎 蔡彭胤撰嘉善大夫前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咸興府尹 李震休 書 嘉善大夫原任司憲府大司憲 權珪篆 昆明南極于海其鎭曰智里之山波奔雲矗綿亘二道九郡數百里直昆之北其峯曰鳳鳴繇峯鳳日庵折而南可二里所右顧靑鶴臺循湧井而東石門峭竪崇於人三之相傳崔文昌與知英能敏二釋子盤旋而樂之者也而寺之實自梁天監二年新羅智證王癸未始名曰靈嶽再新於慈藏法師而爲陀率寺卽唐貞觀之十年善德王丙申也三新於圓敎大師義相而爲靈鳳卽儀鳳之元文武王丙子也四新於了空大師道復爲今名卽咸通乾符之際而景文憲康之間也月 元之季麗恭愍王師 普濟奠者惠勤增而大之是爲五傳越我壬辰之縕火其半聖上之十二年丙寅 神陽子靈日昆峯子惠能思衍住持自凊四道人以南宗之秀擁錫而來䪱而歎曰此非靈聖之區耶起我初祖浮海之世浸浸更浸讀四十年而有慈藏四十年而有圓敎二百年而有了空四百年而有 普濟二百年而火火且今百有六十有五年矣基獨無有乎於是合志同願廣集諸檀凡歷十寒署而大功以完盖爲殿三爲堂六閣三寮一廊而夾其門者二摠而門之曰天王增山溢谷悉復舊觀其剗除修廓之功不啻如側金開山者矣甞覽古記慈藏之入於中國也見文殊化身於終南之雲際寺卽以信具付之曰三韓日尋于戈旄倪塡壑佛之靈不濟必南湫壇而毒龍伏然後其災己矣及了空之西學於一行也行取我山水圖經指示之曰東方之地勢固戰場也譬人有病切脉而鑱石之可也時則追國中而爲伽藍之所者三千五百而是寺也與通度華嚴後先起比禪補之術之所由興也則無論己智異天下之神山也四大師山門之祖宗也絫緣蓄靈而殘缺不圖若四道人者豈不誠法胤之堂構哉況四大師之時費皆出縣官王人董之今四道人徒以誓心苦行積銖寸之微而成之是尤難也神陽子旣新其寺則擧墜弛之戒律興禪誦之遺風三道人與羽翼焉爬梳而濯刷之幾盡己桂坡大師性能撰次本末以四道人聲誦余文余甞爲能以文相丈六殿之役矣感其從事善勝不怠且嘉四道人之功遂爲之銘曰頭流造天南海之堙浮屠宮焉羅絡厥巓我究開綠靈嶽實先惟 慈惟 圓勤後詵前慧緖綿綿千二百年城隍交嬗環海兵纏金地揚烟乃夷乃鶱懿厥老禪聿來聯翩載春周旋載䟽載蠲列欒業掾霧鬱虹鮮福舍復全遐軌其騈曠世比肩如朝暮然心心相傳勝業是延劫火雖燃智燈長懸 康熙四十三年甲申久月 日立 行郡守 通政大夫 黃 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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