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10. 이경호(李景鎬)   원적지(原籍地)가 곤양(昆陽) 솟골로서 부대(父代)에 곤명 신기(新基)에서 하동(河東) 고전(古田)으로 이거(移居) 하였다.   곤명(昆明)과 연고(緣故) 깊으고 문중(門中)이 곤명 임으로 3.1운동사(運動史)와의 3.1운동실록(運動實錄)에서 초기(抄記)한다.   이경호(李景鎬)는 1890년생으로 서숙(書塾)에서 충신열사(忠臣烈士) 애국정신(愛國精神)과 의열기록(義烈記錄)을 읽고 감명(感銘)을 받은 16세때 을사(乙巳) 5조약(條約)이 체결(締結)되어 일제(日帝)에 대한 적개(敵慨)와 증오(憎惡)를 굳게 갖겠금 되었다.   1910년 일제(日帝)는 드디어 한일(韓日) 병합(倂合)의 강제조약(强制條約)으로 경술(庚戌) 국치(國恥)를 다함에 그들 일제(日帝)는 가혹(苛酷)한 무단통치(武斷統治)로서 강압수탈(强壓收奪)을 자행하니 민족 비애(悲哀)를 달랠 길이 없었다.   1919년 2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붕어(崩御)가 일본인에 의한 시해(弑害)라는 풍문(風聞)에 이경호(李景鎬) 등 유림지사(儒林志士)들은 비분망곡(悲憤望哭)으로 날을 보내는 중 3월1일 민족항쟁(民族抗爭)의 불길은 장안(長安)서부터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3월 23일 하동(河東) 장날을 기(期)하여 이경호(李景鎬)는 정성기(鄭成基) 정이백(鄭伊伯)등과 함께 태극기(太極旗)를 극비리(極秘裡)에 대량(大量) 만들어 경계망(警戒網)을 피하여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눠주면서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목이 터지라 외치니 삽시에 800여명의 군중(群中)이 합세(合勢)하여 시위(示威) 가담(加擔)하니 하동(河東)땅은 태극기의 물결과 만세 소리 외침으로 일관(一貫)되었다.   이경호(李景鎬)를 비롯한 정성기(鄭成基) 정선기(鄭宣基)등은 현장(現場)에서 일경(日警)에게 난장(亂杖)을 맞고 끌려가 고문(拷問)과 심문(審問)으로 죽음보다 더한 형고(刑苦)을 받았다.   이들은 진주(晋州) 감옥(監獄)으로 이감(移監)되어 일인판사(日人判事)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앞으로 충실한 일본국(日本國) 신민(臣民)이 되겠는가” 하니 이때 이경호(李景鎬)는 고문(拷問)과 옥고(獄苦)에 지처 쓰러질듯한 몸이면서도 대갈(大喝)하여 “나는 한국의 개가 될지라도 적국(敵國) 일본(日本)의 신민(臣民)이 되지 않겠다”하고 대한남아(大韓男兒)의 의기(義氣)를 과시(誇示)하였다..   그는 징역(懲役) 8월을 선고(宣告)받고 다시 대구(大邱) 복심법원(覆審法院)으로 이송(移送)되어 복역중(服役中) 장독(杖毒) 과 겹친 옥고(獄苦)로 옥사(獄死)하였다.   해방후 계자(系子) 원구(源俅) 및 조카 원재(源宰) 원본(源寳) 등이 대구(大邱) 법원(法院)에서 판결문(判決文)을 찾으러 수차(數次) 노력(努力)하였으나 아직 기록문(記錄文)을 못찾고 있다. 본촌(本村) 거주 김상무(金相武) 상룡(相龍) 상민(相珉)은 직계(直系) 외손(外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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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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