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9. 이범호(李範鎬)   전(前) 곤양향교(昆陽鄕校) 전교(典校) 이며 십수년간(十數年間) 곤명면장(昆明面長)을 역임(歷任)한 이승호(李承鎬)의 종제(從弟)이다.   3.1운동사(運動史)와 3.1운동실록(運動實錄)에 수록(收錄)되어 있는 것을 약기(略記)한다.   “1883년 사천군 곤명면(昆明面)에서 출생(出生)하여 그후 하동군(河東郡) 금남(金南)으로 이주(移住)하였다.   일찍부터 한학(漢學)을 수학(修學)하였고 타고난 성품(性品)이 영민(英敏)하여 풍모(風貌)가 당당하고 헌헌(軒軒) 장부(丈夫)로서 용기(勇氣) 또한 출중(出衆)하여 세운(世人) 를 가리켜 대호(大虎)라 불렀다.   그는 대지(大志) 있었으며 학업(學業) 또한 일취월장(日就月將)으로 심오(深奧)한 유교(儒敎)의 윤리관(倫理觀)에 심취(心醉)하였다.   그가 23세때 1905년 을사(乙巳) 5개 조약(條約)이 강제체결(强制締結) 됨에 분류(憤淚)를삼키고 일제(日帝)를 증오(憎惡) 저주(咀呪) 하였다.   광무(光武) 9년 11월 8일 대한(大韓) 매일신보(每日申報) 사설(社說)에 “대한인민(大韓人民)은 시사(試思)하라 아민(我民)이 타민(他民)에 따르니 애국혈성(愛國血誠)으로 동심분발(同心奮發)하고 동력부기(同力扶起)하여 국권(國權)을 회복(回復)하고 민명(民命)을 보전(保存)하기를 십분진력(十分盡力) 할지어다 여기불능(如其不能)이면 이천만(二千萬) 동포(同胞)가 우마(牛馬)와 여(如)히 구사(驅使)를 당(當)하리니 목하(目下) 현상(現狀)을 불견(不見)하는가 오호(嗚呼)라 기념지재(其念之哉)며 면지재(勉之哉)인져”의 논지(論旨)를 읽고 비분통한(悲憤痛恨)중 1910년 의열사(義烈士)의 피의 항쟁(抗爭)에도 불구(不拘)하고 국치(國恥)의 청천벽력(靑天霹靂)을 당하였다.   이때부터 이 나라에는 밝은 태양(太陽)이 있어도 그 빛을 못보는 암흙(暗黑) 천지(天地)요 무단정치(武斷政治)에 의한 강압(强壓)과 착취와 수탈(收奪)이 있을 뿐 이다. 통치자(統治者)를 상징(象徵)하는 붉은 완장(腕章)을 두른 헌병(憲兵)과 긴칼을 찬 순사(巡査)들이 이 나라 백성(百姓)들의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權限)을 지닌 염라대왕(閻羅大王)이다. 입을 봉(封)해야 하고 눈을 감아야 하고 귀를 막아야 살아 갈 수 있는 압제(壓制)의 세월(歲月)이 1919년을 맞이 하였다.   동년 2월말에 또 하나의 비보(悲報)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시붕(弑崩) 소식이 전해지자 이범호(李範鎬)의 의분(義憤)은 배일운동(徘日運動)의 선구(先驅)가 되리라 작심중(作心中) 3.1독립만세운동(獨立萬歲運動)이 3월중순에는 서부경남(西部慶南) 일대(一帶)에도 번져 왔다.   3월 18일 하동(河東)에서 최초(最初)로 만세의거(萬歲義擧)가 일어나자 이범호(李範鎬)는 정락영(鄭洛榮) 정재운(鄭在雲) 정희근(鄭禧根) 등과 모의(謀議)하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비밀리(秘密裡)에 다량(多量) 등사하여 금남(金南) 일원에 연락(連絡)하여 4월3일 (음 3월 3일) 고유명절(固有名節)일을 이용(利容)하여 수 많은 주민(住民)들을 면소재지(面所在地)인 대치리(大峠里)에 운집(雲集)케 하고 이범호(李範鎬) 등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낭독(朗讀)한 후 대한독립 만세를 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 행진(行進) 하였으니 이 대열(隊列)은 진교(辰橋)까지 진군(進軍)되었다.   다음날 4월4일에는 다시 많은 군중(群衆)이 집합(集合)하여 그날은 노량(露粱)을 건너 멀리 남해(南海)까지 시위(示威)를 전개(展開)하며 그 의기(意氣)는 충천(衝天) 되었다.   이 의거(義擧) 이후 주동자(主動者)인 이범호(李範鎬)를 위시(爲始)하여 정락영(鄭洛榮) 정재운(鄭在雲) 정희근(鄭禧根) 등은 체포(逮捕)되어 예외(例外)없이 가혹(苛酷)한 고문(拷問)과 신문(審問)을 받았고 이어 진주(晋州) 감옥(監獄)으로 압송(押送)되어 재판(裁判)에 회부(廻附) 되었다.   이범호(李範鎬)는 징역(懲役) 6월의 형(刑)을 선고(宣告)받고 진주형무소(晋州刑務所)에 복역(服役)하고 출감후(出監後)에는 민족운동(民族運動)에 가담(加擔)한 바 있다.   이범호(李範鎬)는 일경(日警)의 압제(壓制)와 감시하(監視下)에 인고(忍苦)의 세월(歲月)을 보내다가 해방(解放)을 맞이한 그 익년(翌年) 1946년 72세를 일기(一期)로 영민(永眠)하였다.“   유족(遺族)인 장남 원희(源曦)와 원설(源离)이 진주법원(晋州法院)에 기록문(記錄文)을 찾으려고 노력(努力)하였으나 아직도 못찾고 있다.   여기 이범호(李範鎬) 박치화(朴致和)가 별도(別途) 작성(作成) 선포(宣布)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원문(原文)을 그대로 적는다

大韓獨立宣言書   皇天이 주시고 神明이 도으사 世界平和의 會議가 刱開됨을 伴하야 民族自決의 輿論이 幷起하뇨 此好運이 來하얏도다 鳴呼라 十個星霜을 他의 羈絆下에서 忍痛呻吟하던 우리 大韓同胞여 確乎한 精을 勵하여 迅速히 手를 着하야 時가 來하고 運이 復하얏네 躕躇치말며 觀望치말고 우리의 事業을 우리의 心力으로 自決斷行합시다. 我의 心機舌鋒은 他의 長鎗巨砲보다 優勝하니 一心團體로 光復地로 幷向합시다. 最後의 一人과 最後의 一刻々지 暴動과 亂擧는 行치말고 人道와 正義로 獨立門으로 前進합시다. 於戱라 大韓光復과 東洋親睦과 世界平和가 今日로부터 實現되얏소 奮起하고 猛進하라 우리半萬年 神聖한 歷史와 三千里錦繡의 彊土를 有한 우리同胞여 檀君開國四千二百五十二年二月十七日   朴致和 鄭洛榮 鄭寅永 李聲雨   李範鎬 朴宗源 李炳鴻 鄭禧根   金應鐸 李輔淳 黃學成 金斗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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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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