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정동(井洞) 야학교(夜學校) 성방리(城方里)의 깊숙한 정동(井洞)입구에 3칸으로 세워진 목조건물(木造建物)이 벽(壁)은 헐어지고 창문(窓門)은 떨어져서 보잘 것 없이 우뚝 서있지만 이것이 1930년 초에 세워진 정동(井洞) 야학교(夜學校)이다. 당시는 80%가 초등학교도 다닐 수 없는 농촌환경(農村環境)이었으니 그 연유(緣由)는 일제(日帝)의 수탈정책(收奪政策)으로 조반석죽(朝飯夕粥)도 어려운 처지(處地)었으니 오늘날에는 상상(想像)도 할 수 없다. 이 가운데 문맹퇴치(文盲退治)운동이 일어나 각 마을마다 생겨난 것이 야학교(夜學校)이다. 지금은 면내(面內)의 야학교(夜學校)가 거의 소멸(消滅)되고 정동(井洞) 야학교가 유일(唯一)하게 현존(現存)하고 있음으로 동민(洞民)들은 유적(遺蹟)으로 보존(保存)키로 보수(補修)하여으니 여기에 기록하여 두는 바이다. 해방 후 자유당(自由黨)시대까지 이 학교는 존속(存續) 하였으니 강사진(講師陣)으로는 박차술(朴次戌) 김정섭(金正燮) 김정찬(金正贊) 박점린(朴点麟) 조복래(趙福來)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