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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1. 보안암 석굴(普安庵 石窟)   보안암 석굴(普安庵 石窟)은 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는 암자로서 옛날에는 미륵암(彌勒庵)으로 불렸고 지금도 흔히 미륵암으로 통한다. 보안암의 소재(所在)는 곤양면 무고리(舞鼓里)에 속하고 있다.   이 절은 건립초(建立初)부터 다솔사(多率寺)에 소속된 암자일 뿐 아니라 옛적에는 서봉사(栖鳳寺)에 속해 있었던 절이었다. 1336년에 이곡(李穀 : 牧隱의 父)이 쓴 서봉사사적(栖鳳寺事蹟)에 의하면 서봉사의 남쪽 천령(天嶺) 위에 석감(石龕)을 만들어 미륵석상(彌勒石像)을 봉안한 것은 신라 신문왕때의 두 왕자(王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17세기 중엽의 최응천(崔應天)도 미륵봉(彌勒峰)의 석실(石室)안에 장육석불(丈六石佛)이 봉안 되어 있다고 서술하였었다.   신라 흥덕왕5년(830)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선지(選地)했다는 설(設)이 있으나 문헌(文獻)에는 없고 최근 황수영(黃壽永) 교수(敎授)의 조사에 의하면 이 불상은 그 조각수법(彫刻手法)으로 보아 고려말의 작품(作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석실(石室)은 이곡(李穀)이 사적기(寺蹟記)를 쓰던 1336년 이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인 만큼 문헌상(文獻上) 기록과 불상(佛像)의 양식(樣式)을 더 깊이 고증(考證)한다면 새로운 사실(事實)이 발견될 것임으로 학구(學究)의 필요를 느끼며 이에 황수영(黃壽永) 교수의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에 관한 논문을 수록한다.   사천보안암석굴(泗川普安庵石窟)과 하동리맹굴(河東理盲窟) 黃 壽 永

(1) 前 略   1964년 12월 9, 10일 양일에 걸쳐 경남사천(慶南泗川), 하동량읍(河東兩邑)의 경계 지역에서 전혀 예기하지 못하였던 한국(韓國) 석굴사원(石窟寺院)의 현존 유구와 동(洞) 유적과 합계 3건을 조사할 수 있었다. 이들에 대하여서는 앞으로 본격적인 현상 및 발굴 조사가 기대되는 바이나 경주(慶州) 토함산석굴(吐含山石窟)을 정점으로 삼는 우리나라 석굴사원(石窟寺院)의 계보에서 매우 귀중한 작품으로 인정되었으므로 이곳에 그 조사한 바를 략기(略記)하여 두고자 하는 바이다.   지리산(智異山) 지구에서는 이미 1차 답사에서 남원(南原), 운봉(雲峰), 영원치(女院峠)의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과 그것을 봉안하였던 목조불전(木造佛殿)형식의 유적(遺蹟)을 재조(再調)한 바도 있었으나 금차(今次)의 신례(新例)는 그 보다 한층 귀중하다. (2)   먼저 사천군(泗川郡) 서포면(西浦面) 무고리(舞鼓里)에 있는 다솔사(多率寺)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을 들어 보겠다. 이 보안암 (普安庵)은 원래 서봉사(栖鳳寺)에 소속되어 왔으나 거금(距今) 약 150년전 동사(同寺)가 폐함에 오늘의 다솔사(多率寺) 구영악사(舊靈岳寺)에 귀속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에 오르는 로순(路順) 또한 현재에 있어서는 다솔사(多率寺)의 주산(主山)인 봉명산(鳳鳴山)의 서록(西麓)에 올라 능선을 우회하여 그 북(北)에 솟은 천왕봉(天王峰) 정상 가까이 올라야 한다. 이 천왕봉(天王峰)은 지리산(智異山)이 남(南)으로 뻗어 하동(河東)과 사천(泗川) 경계에 륭기(隆起)시킨 리맹산(理盲山)(569m)과도 연맥되고 있어 해발 약 3백m에 달한다. 이 천왕봉(天王峰) 동서(東西) 정상 가까운 산협을 이용하여 그 중앙에 한 석굴을 중심으로 그 행좌(向左)에 요사(寮舍)와 행우(向右)에 산신각(山神閣)각 1동을 배치 하였으며 주중(住僧)은 비구니(比丘尼) 수명에 불과 하였다.

  이 보안암(普安庵)의 사적에 대하여서는 현판(懸板) 2매가 요사(寮舍)에 남아 있을 뿐인 바 그 기문(記文)과 구전(口傳)에 의하면 약 백년 전후에 중창(重創)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다시 수년 전에는 부산(釜山) 신도의 희사로써 석굴의 개수(改修)가 있었다고 하는 바 이같은 최근의 보수는 석굴 정상부의 양회(洋灰) 또는 입구(入口) 목조가구(木造架構)의 변형 등에서 곧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년의 개수에도 불구하고 굴 내외의 조형 수법에서 원상을 추정케 하여 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먼저 석굴(石窟)은 상기(上記)한 바와 같이 인공(人工)으로 마련된 남북장(南北長)의 대지 위 중앙에 축조되었는데 그 용재(用材)로서는 판형(板形)의 사암질할석(砂岩質割石)을 단층형으로 쌓아 올려 분모형(墳墓形)을 이루었는데 그 기부(基部)에는 수단(數段)의 자연거석(自然巨石)으로써 하였다. 또 이와 같은 석굴에는 원래 봉토(封土)를 가하지 않았던 듯 하며 우누(雨漏)를 막기 위해서는 정상부에 즙와(葺瓦)하였다고 추정되었다. 현재 이 정상부에는 전면에 야외를 두껍게 발랐으나 동서(東西)로 옥배(屋背)를 마련하고 그 량단(兩端)에는 평화당(平瓦當)을 하나씩 장식하였다. 그리고 이 석굴 전면(前面)을 따라 행좌즉(向左卽)으로 축대를 연장시켰는바 이같은 수법은 또한 토암산(吐含山) 석굴의 원상과도 매우 유사하다.   다음에 이와 같이 거의 방형(方形), 일변(一邊) 약 7.7m 높이 5.5m을 이뤄는 외부(外部) 정면 중앙에는 3단의 장대석(長大石)을 중첩(重疊)시켜 석굴(石窟)에 오르는 층계를 삼았으며 그 상부 일석(一石) 좌우에는 각 원공(圓孔) 일개씩을 잔각(淺刻)하였는데 이것은 쌍주(雙柱)를 세우기 위한 방식으로서 현존하는 쌍주(雙柱) 이전의 조형이다. 현재 또한 쌍원주(雙圓柱)를 세우고 그 위에 목조가구(木造架構)를 짜서 석굴 정면에 접착시켰는바 옥개(屋蓋)는 편면(片面)뿐이며 즙와(葺瓦)는 수년 전 스레트판(板)과 교체 되었으나 목부(木部)에는 오랜 단청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이같은 목조 가구는 우리나라의 석굴 전면 또는 마애석상(磨崖石像) 전면에 설치되어 오던 전통적 방식으로서 토암산석굴(吐含山石窟) 또한 그 창건 당초부터 전실(前室) 옥개(屋蓋)를 덮어 그 전면(前面)에 목조가구(木造架構)를 시설하였던 것과 같다. 이같은 석굴(石窟)내지 그 한 변형으로 고찰할 수 있는 우리나라 상고의 마애석불(磨崖石佛) 등 불교 조형에 있어서는 삼국(三國) 이래 이와 같은 목석(木石) 혼용의 경영(經營) 방식을 채택한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필자의 조사로서는 삼국기(三國期)의 경주(慶州)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 장창곡(長倉谷) 삼존석상(三尊石像)의 원재석감(原在石龕)또는 신라통초(新羅統初)의 경북(慶北) 봉화군(奉化郡) 물야면(物野面) 북지리(北枝里) 소재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동반가석상(同半跏石像) 소재 건물지(建物址) 또는 고려(高麗)에 들어서 충북(忠北) 괴산군(槐山郡) 상모면(上芼面) 미륵리(彌勒里) 여래입상(如來立像)의 석실(石室) 및 그 상부(上部)의 목조가구(木造架構)등이 그 류(類)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이 목조 가구를 들어서면 장방형의 통로(通路) (높이 1.8m, 길이 2m)가 마련되었는데 이것은 경주(慶州) 토암산(吐含山) 석굴에서 사천왕(四天王)을 좌우에 배치된 입구의 수법과도 같다. 그리고 주실(主室)은 거의 정방형을 이루었는데 사벽(四壁)은 외부와 같이 잡석(雜石)으로 쌓아 올렸고 다만 사우(四隅)에서 거대한 판석(板石)을 삼(三)각형으로 돌출시켜서 천정에 이르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석벽(石壁)의 견고를 위한 방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천정부는 동서(東西)로 장대석(長大石) 이 (二)개를 걸치고 다시 그 위에 또 하나의 장대석(長大石)을 얹었는데 이들은 모두 당대의 석축(石築) 또는 횡혈식석실모(橫穴式石室墓)의 수법과도 상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이 석실(石室)의 북측 하벽(下壁)에는 굴외로 통하는 방공(方孔)이 뚫려 있어 외부(外部)에서 평와(平瓦)로서 막음하였는데 이것은 굴내의 통풍을 위한 장치일 것이다. 석실(石室)은 동서(東西) 2.9m,남북(南北)3.5m 높이 2.45m)   이와 같은 굴실(窟室) 중앙에는 결가부좌(結跏趺座)한 강마수인(降魔手印)의 여래석상(如來石존좌상(本尊坐像) 후면 좌우로는 각 팔(八)구의 석조 라한좌상(石造羅漢坐像)을 배치 하像)(좌고(坐高) 1.9m) 이 안치 되었는데 그 대좌로서는 자연판석(自然板石)을 놓았으며 광배(光背)는 아니 보인다 통견(通肩)의 전신(全身)에 백희를 바른 것은 근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 본였는데 모두 저왜(低倭)하며 또 본존(本尊) 앞에는 탁자형 석상을 놓았는데 그 정면의 면석(面石)에는 안상내(眼象內) 가득히 귀면(鬼面)을 양각하였다. 이 면판석(面板石)은 좌우의 측석(側石)과 더불어 조립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본존여래좌상(本尊如來坐像) 구를 중심으로 일육라한(一六羅漢)이 있을 뿐이고 동벽(同壁)에는 아무런 상설(像設)이 없으며 석실 입구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 계액(揭額)하였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공 축조의 석굴로서 크기와 굴내 평면 및 봉안 존상 등 제점(諸點)에서 신라(新羅)의 토암산석굴(吐含山石窟) 또는 팔공산(八空山) 군위(軍威) 삼존석굴(三尊石窟)과 차별상을 보이고 있으나 점정방식(占定方式)이나 축조 방법과 전면(前面)의 목조가구(木造架構) 등에서 선대(先代)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점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1962년 새로 주목된 군위석굴(軍威石窟) 이래 새로 출현한 후대 유구(遺構)의 하나로서 이만큼이나마 보존된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3) 中 略 (4)   끝으로 이와같이 사천(泗川), 하동(河東), 량군(兩郡)에 걸쳐서 이맹산(理盲山)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에 석굴사원이 경영된 사연을 더듬어야 할 것이다. 사천 보안암석굴(泗川普安庵石窟)은 그 점정 위치와 조형 방식에서 보아 경주(慶州) 토암산(吐庵山) 석굴암(石窟庵) 석굴과 매우 유사함을 지적한 바 있거니와 그 경영 인연에는 비단 신앙면에서 뿐 아니라 각기 연대를 달리 하면서도 공통된 지연(地緣)내지 역사적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경주(慶州) 석굴이 신라(新羅)의 역사와 동해(東海)와는 깊은 관계가 있었다면 이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은 그 시대적 배경과 남해(南海)와의 그것을 생각하여 볼 만하다. 사천(泗川)은 [재해빈(在海濱) 지최벽이원(地最僻以遠) 위읍기고(爲邑旣古) 역당왜적지충(亦當倭賊之衝). 未有堡障之有焉 在昔麗季 癈爲鋒鏑之場]이라 하였으며 이와 접한 남해(南海) 또한 [倭寇之淵薮]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천(泗川) 남해(南海)의 땅을 부감(俯瞰)하는 보안암(普安庵)의 점정 위치와 그 방위가 동행(東向)인 점은 조형면에서의 경우 석굴과의 연관과 더불어 그 조성 인연을 고찰함에 있어 주목 되어야 할 것이다.   동해(東海)에서 남해(南海)에 이르는 연안 배치의 고대 사원들이 그 창건 사적에서 왜구(倭寇)진압을 말하고 있는 것은 또한 이곳에서 주목 되어야 할 것이다.   신라(新羅) 문무대왕(文武大王)의 동해(東海) 감은사(感恩寺), 시제(始制)이 욕진왜병(欲鎭倭兵)에 있었으며 범어사(梵魚寺)의 창건 사적, 혹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삼(卷三) 금관성사파석탑조(金官城娑婆石塔條)에 보이는 겸이진남왜(兼以鎭南倭) 또는 [千古南倭遏怒鯨]이란 문자는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사천(泗川)보안암(普安庵) 석굴은 이와 같은 사연에서 뿐 아니라 그 굴내(窟內) 봉안 석상의 존명(尊名) 추정을 통하여 더욱 그 내실(內實)을 밝힐 수가 있을것인바 이에 대하여 다른 기회를 얻고자 한다. 또 리맹굴(理盲窟)에 대하여서도 위에서 설명한 비보설와(裨補設話)에서 뿐 아니라 그 점정 등에서 경영의 인연이 밝혀져야 할 것인바 이에 대하여서도 앞으로의 조사를 기다리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들 사천(泗川) 및 하동(河東)에서 새로 주목된 일군(一群)의 석굴 사원에 대한 종합적 고찰을 통하여 그 조형적 특색과 정신적 내용이 규명되어야 하는 바 다만 그 건립의 연대에 대하여서는 보안암(普安庵) 석상의 양식을 주로 하여서 려말(麗未) 선초경(鮮初頃)으로 추정된 바 있음을 적어 후일의 상고(詳考)를 기하고자 한다.   (1966. 12. 27 東國史學 第 9 -10輯 196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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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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