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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창원(昌原) 황씨(黃氏) 첨정공파(僉正公派) 흥사(興士)   시조 황석기(黃石奇)의 호는 회암(檜巖)이다. 원(元)나라 공주를 배행(陪行)하고 우리나라에 와서 고려왕이 의창(義昌)으로 적(籍)을 주니 의창은 지금의 창원(昌原)이다. 충혜왕(忠惠王)때 지밀직사(知密直事)로 도첨의참리(都僉議叅理)에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이 되었다. 공(公)은 40여 년간을 관직에 있으면서 다섯 왕조를 섬기며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이르고 시문(詩文)과 서예(書藝)에 능하여 당대에 여러 현자들의 추앙을 받았다. 2세손 상(裳)은 공민왕 때 밀직부사(密直府使)로 추충좌리공신(推忠佐理功臣)이 되고, 홍건적(紅巾賊)의 난에 개경이 함락되어 왕이 피난하게 되자, 아버지 공희공(恭僖公)을 따라 왕을 호종(扈從)하여 강릉도만호(江陵道萬戶)가 되고, 개경을 수복하여 호종공(扈從功) 및 수복공(收復功) 일등을 받았고, 추충분의익찬공신(推忠奮義翊贊功臣)에 회성부원군(檜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우왕(禑王) 원년에 서강도원수(西江都元帥)로 왜구토벌(倭寇討伐)에 많은 공을 세웠다. 6세손 준(濬)의 호는 도은(道隱)이니 문종(文宗) 원년에 문과에 오르고, 단종(端宗) 2년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오르고,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진주 방어산(防禦山)으로 돌아와 조어계(趙漁溪)와 함께 은거(隱居)하였다. 7세손 리(离)는 선략장군(宣略將軍) 영호군참의(領護軍參議)를 지냈다. 9세손 윤신(允信)은 연산 때에 봉직랑덕릉창봉(奉直郞德陵參奉)이고, 10세손 희철(希哲)은 장사랑(將仕郞) 순릉참봉(順陵參奉)이다. 11세손 경헌(景憲)은 무과에 올라 훈련첨정(訓練僉正)을 지냈고,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악수산성(岳竪山城)에서 순절하니 선무2등공신(宣武二等功臣)에 기록되었다. 12세손 예일(藝一)은 진사(進士)로 임진왜란때에 부형(父兄)과 함께 동시에 순절(殉節)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다. 13세손 천(燀)은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시묘(侍墓) 3년을 하였고, 곤양으로 들어온 조상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무신(戊申)란에 의병을 일으켜 무주(茂州) 무풍령(茂豊嶺)에서 전공(戰功)을 거두고 부자(父子)가 순국(殉國)하니 분무원종공신록(奮武原從功臣錄)에 기재되어 있다. 16세손 이징(二澄)은 무과로 영조(英祖) 무신(戊申)란에 의병을 통솔하여 토벌하고 아버지와 같이 원종공신록(原從功臣錄)에 기재되어 있다. 18세손 종락(鍾洛)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을 지냈다. 총 7호이지만 곤양에는 2호가 살고 있다.   문중대표는 수덕(秀德)이고, 종손은 23세손 용화(容華)이다. 22세손 봉호(鳳浩)는 초등학교장을 역임하였고, 23세손 용인(容仁)은 진주고등학교 교사이며, 명조(命祚)는 진주농산물검사소에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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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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