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驪陽) 진씨(陳氏) 백곡파(栢谷派) 본촌(本村) 시조의 휘는 총후(寵厚)이다. 고려 16대 예종(睿宗) 때에 호분위대장군(虎賁衛大將君)을 지내고,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토평(討平)하는데 공을 세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君)에 오르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휘 유(猷)는 산음현감(山陰縣監)을 지내었다.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하다. 12세손 휘 복명(福命)은 진사이다. 13세손 휘 식(寔)은 명종(明宗) 2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의(工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뒤 치사(致仕)하였다. 14세손 휘 극경(克敬)은 가정병오(嘉靖丙午)에 백곡(栢谷)에서 태어나 후에 호를 백곡이라 하였다. 기상이 엄준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대학자로 명성이 높다. 일찍이 밤에 큰 호랑이를 만났으나 가축처럼 대하니 곧 물러갔다. 조남명 선생과 산천재(山天齋)에서 경의(敬義)의 설을 강(講)하고 사사(師事)하였으며, 갈천(葛川) 임 선생의 문하에서 강질(講質)하였다. 덕천서원(德川書院)의 창건에 공이 많으며 사우록(師友錄)을 선집(選集)하였고, 이학(理學)에 잠심(潛心)하여 사문진흥(斯文振興)에 힘썼다. 정강서원(鼎岡書院)과 덕원(德源) 의달산사(依達山祠)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 18세손 휘 삼후(三垕)는 호가 원오정(願五亭)으로 학행(學行)으로 유명하다. 20세손 휘 학(鶴)이 곤양 본촌으로 들어왔다. 후손은 현재 곤양에 17호, 서포에 20여 호가 살고 있으며, 본촌(本村)에 백곡재(栢谷齋)를 창건하여 봉사(奉祀)하고 있다. 문중대표는 종손(宗孫) 경제(慶濟)이고 희성(熙聖)은 신학박사로 영남신학대학교 총장에 보직되어 있으며 헌빈(憲彬)은 하동군 북천면 농업협동조합장이다. 삼성(三聖)은 사천시의회 의원을 역임하고 있고, 성열(聖烈)은 국세청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헌무(憲茂)는 산림청 중앙 사무관에 보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