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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진주(晋州) 정씨(鄭氏) 석정공파(石亭公派) 본촌(本村)   시조(始祖) 휘는 신(侁)이니 고려 인종(仁宗) 때에 통례문저후(通禮門袛候)에 이르렀으나 당시에 간신의 무리가 용사하여 국정의 문란함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진양군(晋陽郡) 진성면(晋城面) 백암리(白岩里)에 은거하였다. 6세손의 휘는 희(禧)니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요, 7세손의 휘는 천린(天麟)이고 봉익대부(奉翊大夫) 영해부사(寧海府使)로서 주지(州誌)에 기재되어 있다. 8세손 휘 돈(惇)은 봉상대부(奉常大夫)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냈고, <진양지(晋陽誌)>(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하양(河陽)ㆍ무안(務安)의 현감(縣監)을 지냈다. 성품이 청렴(淸廉)하고 온공정직(溫恭正直)하여 향인(鄕人)의 추앙을 받았다. 11세손 휘 장손(長孫)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12세손 휘 세창(世昌)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광흥창수(廣興倉守)를 지냈다. 중묘정국(中廟靖國)때에 참여하여 원종훈(原從勳)에 올랐고, 중종(中宗) 경오(庚午)년 삼포(三浦)의 란(亂)에 많은 공업(功業)을 세웠다. 13세손 휘 인평(仁平)의 호는 락진헌(樂眞軒)이니 음(蔭)으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고, 구암(龜岩) 이정(李楨)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행정(杏亭)을 지어 학문을 강론하고, 퇴계(退溪) 이(李) 선생과 조지산(曹芝山)으로 교유(交遊)하였으며 또한 효행으로 <주지(州誌)>에 기재되어 있다. 14세손 휘 홍조(弘祚)는 호가 석정(石亭)인데 분파(分派)의 조(祖)이다. 음직(蔭職)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냈고, 선조(宣祖) 기축(己丑)의 변(變)에 진주(晋州) 판관(判官)인 홍정서(洪廷瑞)의 무인(誣引)으로 옥고(獄苦)를 치루었는데, 형벌이 매우 극심하여도 곧고 바른 소리로 응대하면서 조금도 굽힘이 없었으니 영남사림(嶺南士林)이 공의 강직함 때문에 화(禍)를 면하였다는 사실(事實)이 주지(州誌)에 기재되어 있으며, 존덕사(尊德祠)에 제향하고 있다. 15세손 휘 준(濬)은 박항암선생(朴篁岩先生)의 제자로 학문(學文)과 행의(行誼)가 세인(世人)의 칭송을 받았으며, 향안(鄕案)에 올라 있다. 17세손 휘 억령(億齡)은 학문(學文)이 해박하고 서필(書筆)이 정묘(精妙)하였으며 무과(武科)에 오르고, 효행(孝行)이 돈독하여 설리(雪裡)에 고기를 구하고, 영산(靈山)에서 인삼을 캐어 어머니의 병을 치유하고 여모 3년을 하였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포상을 받았으며 <진주지(晋州誌)>에 기재되어 있다. 면우(俛宇) 곽선생(郭先生)이 게문(偈文)을 찬(撰)하였다. 19세손 휘 재점(再漸)이 하동 첨암으로 이거하였다가 22세손 휘 종환(琮煥)이 다시 곤양으로 이주하여 본촌에 20여 호가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17호가 부산으로 이거하고 곤양에는 3호가 거주하고 있다.   문중대표는 28대손 재현(在鉉)으로 현재 부산 중부소방서 소방과 경리주임의 보직을 가지고 있으며, 종손은 28대손 재세(在世)이다. 27세손 차상(且相)은 부산북부소방서 소방령으로 정년퇴임하고, 27세손 동철(東哲)은 부산진소방서 소방장으로 정년퇴직하였으며, 27세손 삼상(三相)은 부산중부소방서 파출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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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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