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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진주(晋州) 정씨(鄭氏) 공대공파(恭戴公派) 흥사(興士)   진주정씨 공대공파는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왕조 성종 때까지 조선 초 6조를 봉직한 세종 때의 대신 정척(鄭陟)공을 파조(派祖)로 하고 있다. 공의 시호는 공대(恭戴)로서 세종이 즉위하자 공에게 청직(淸直)을 하사하니 이미 태종 때부터 공의 청백리(淸白吏)정신은 조정은 물론 세상에 회자(膾炙)되어 왔다. 공이 이룩한 조선 초의 사적(史蹟)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으나, 그 중 단군사당을 세우기로 한 것은 당시 사온주부(司醞主簿)인 공의 상서에 의하여 이룩된 것으로 겨레의식과 우리 민족의 정체성(正體性)을 고취한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은 한편 예악에 정통하였으며 해박한 식견을 바탕으로 성종 원년에 <아악일첩>, <악보일첩>, <연향가사> 후에 악학궤범의 기초가 됨)를 창작 정리한 업적을 임금이 보고 감읍하여 <고려사>를 하사한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공의 자는 명지(明之)이고 호는 정암(整菴)인데, 정척(鄭陟)에 이르러 가문의 명성이 크게 드러났다. 영락(永樂) 무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갑오년에 문과에 합격, 승진을 거듭하여 판사로 승진하였다. 세종조에는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는가 하면 자헌대부와 판한성부사, 수문전대제학에 승진되고 충청도 관찰사, 성화(成化) 무자년에는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성종조에 <오례의(五禮儀)>를 찬술하여 조정의 잘못된 의제(儀制)를 바로 잡았으며, 수차례 과시(科試)를 주재하여 한때 호걸스러운 선비들이 모두 공의 문하에서 배출되기도 하였다. 충근은 관이 직장으로 청백리를 지냈으며, 슬하에 3남(奫, 夽, 奃) 1녀를 두었다. 장남 윤은 감찰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석성(碩成)은 참군과, 아들 걸(傑)은 자헌병판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경량(慶良)은 시호가 남호공(南湖公)으로 경연참찬관, 평시봉사 등의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한 번도 공명에 연연하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경전과 제자백가서를 심독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남호공의 아들 존극과 명극은 주부(主簿)와 이조좌랑(吏曹佐郞)을 지냈으며 임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국란에 나아가 매서운 절조를 불사르며 아깝게 전망했다. 명극의 아들 입(笠)과 그의 아들 계인(繼仁) 역시 부사직과 훈련원 판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이 건융 59년에 절충장군중추부사를 지낸 곤양에 처음 들어온 무회(武會)이다.   아들 광휘(光輝), 광필(光弼)을 두어 지금까지 흥사동(興士洞)을 위시하여 사천ㆍ삼천포 등지에서 살고 있으며, 흥사에 회광재(會光齋)를 지어 시제(時祭)를 모시고 있다.   문중대표는 용대(容大)이고, 종손은 23세손인 용태(容泰)이다. 광화(光和)는 공군본부 서기관으로 재직 중이며, 용래(容來)는 의학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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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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