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晋陽) 정씨(鄭氏) 우곡파(隅谷派) 무고(舞鼓)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휘 헌(櫶)이고, 중조(中祖)는 3세손 휘 온(溫)이며, 호는 우곡(隅谷)이다. 여조(麗朝)에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의 관직을 지내었다.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의 실정(失政)을 통탄하여 관직을 사양하고 진주 사봉면(寺奉面) 사곡(砂谷)에 은거하면서 호를 우곡(隅谷)이라 하였다. 이태조(李太祖)가 등극(登極)하여 여러 차례 등사(登仕)를 종용하였으나 청맹(靑盲)으로 앞을 못 본다하여 사양하니 왕이 이제(李濟)를 보내어 솔잎으로 눈을 찔러 시험하였지만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志操)를 지키며 두문동(杜門洞)의 72현 중 한 분이다. 선생의 11세손의 휘는 명익(明益)이고, 호는 아산(芽山)이다. 진양(晋陽)에서 곤양(昆陽) 무고(武庫)로 이주하여 10여대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18세손 동명(東明)의 호는 매서(梅西)인데 학행(學行)으로 유고(遺稿)가 있다. 손(孫) 재경(在景)은 면의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20세손 휘 재완(在玩)은 효행으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부터 포창(襃彰)을 받았으며 동구(洞口)에 효자비(孝子碑)를 세웠다. 휘 재규(在圭)는 후생(後生)을 양성하기 위하여 서부초등학교(西部初等學校)를 창건(創建)하였다. 이런 공로로 학구민(學區民)이 공적비(功績碑)를 교문 앞에 세웠다. 휘 재진(在珍)은 곤양에 들어온 선조(入昆陽先祖)의 재실인 병산재실(屛山齋室)을 종인(宗人)과 합심하여 창건한 바 있다. 21세손 재갑(在甲)은 경상남도의회 의사국장을 역임하였고, 재옥(在玉)은 현재 진주시 금산면장에 재직중이며, 원주(元柱)의 호는 양산(陽山) 인데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大韓佛敎 曹溪宗 總務院 社會部長)으로 있다. 손세(孫勢)는 300여 호이나 경향각지에 흩어져 있고, 무고에는 20여 호가 살고 있으며, 진주정씨 우곡파 대종회장(晋州鄭氏 隅谷派 大宗會長)은 도용(道鏞)이고, 종손(宗孫)은 24세손 현주(賢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