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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합천(陜川) 이씨(李氏) 전서공파(典書公派) 우티(牛峙)   시조 이개(李開)는 신라초기의 6촌 중 양산촌(楊山村)의 수장(首長)이었던 표암공(瓢岩公) 알평(謁平)의 원대손(遠代孫)이다. 신라 말에 강양(江陽)의 호족(豪族)인 휘(諱) 개(開)께서는 경순왕(敬順王)의 손서(孫壻)로서 강양군(江陽君)에 봉하여졌으나 고려태조가 후삼국을 통일 할 때 전대공신(前代功臣)으로 폄위되어 가수현장(嘉樹縣長)으로 강등되었다가 뒤에 합천(陜川) 호장(戶長)이 되었다고 한다. 호장은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다음 각 지방에서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들을 포섭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그들에게 호장이라는 향직(鄕職)을 주어 그 지방을 자치적으로 다스리게 하던 제도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합천 이씨는 신라시대부터 고려 초에 이르기까지 합천 지방에서 세력을 떨쳤던 호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계(上系) 10세를 전후(前後)하여 15파로 나누어져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는데 시조(始祖) 강양군(江陽君)의 10세손 휘 수전(守全)이 전서의 관직을 지내어서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11세손 휘 경분(景芬)은 상서좌복사(尙書左僕射)를 지내었다. 12세손 길(佶)은 조의대부사정(朝議大夫司正)의 관직을 지냈다. 13세손 담(擔)은 중정대부감찰(中正大夫監察)로서 규정(糾正)을 지냈다. 14세손 휘 운호(云皓)의 호는 청원재(淸源齋)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의 관직을 지내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단성(丹城)에 거주하였다. 15세손 사방(斯昉)은 봉순대부(奉順大夫) 지영주군사(知永州郡事)이다. 16세손 권노(權老)는 조선초서반무관사직(朝鮮初西班務官司直)을 지냈으며 17세손 양근(壤根)은 행군수(行郡守)였다. 18세손 동재(棟材)는 문과 참봉(參奉)이었다. 19세손 휘 계통(季通)은 문과(文科)에 올라 부호군(副護軍)을 지냈고,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다.   문익점 선생 중손서(重孫壻)로서 문씨(文氏)집안이 변고(變故)로 흩어져 공개(空開)되어 남평문씨비(南平文氏妣)로서 친정으로 이종하니 공이 비로소 진주 단성 배양에 정착하였다. 20세손 승문(承文)은 참봉(參奉), 21세손 잠(潛)은 참봉(參奉), 22세광임(光任)은 자야보(字冶甫)로 단성향안(丹城鄕案) 수제(首題), 23세손은 헌(獻)이다. 24세손 휘 정실(廷實)은 가선대부(嘉善大夫)였다. 25세손 휘 희(曦)는 선무랑상의원(宣務郞尙衣院) 별좌(別座)를 지내었다. 25세손 장남(長男) 희(曦), 차남(次男) 오(旿)는 곤양 서포에 정착(定着)하고, 또 삼남 노(魯)는 남해방면(南海方面)으로 이거하였으며 현재 자손은 100여 세대로 번창하였고 타지로 이거한 자를 제하고 곤양ㆍ서포에는 40여 호가 살고 있다.   문중대표는 34세손 판룡(判龍)이고 종손(宗孫)은 36세손 성호(成浩)이다. 35세손 창기(昌起)는 서포면 부면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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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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