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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파평(坡平) 윤씨(尹氏) 소정군파(昭靖公派) 흥사(興士)   시조(始祖)의 휘는 신달(莘達)은 고려조에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를 지냈다. 중흥조(中興祖) 문숙공(文肅公) 휘 관(瓘)은 문종(文宗)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成宗) 때 합문지후로 광주(光州) 충주(忠州) 등지에 파견되었다가 숙종(肅宗)때에 좌사낭중이 되었다. 이어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가 되어 사신으로 송(宋)나라에 다녀왔다. 예종(睿宗) 2년에 여진(女眞) 정벌군원수(征伐軍元帥)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평정하였다. 그의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병부사(判兵部事) 상주국(上柱國) 감수국사에 이르고 예종모정에 배향되었다. 6세(世) 휘 언이(彦頤)는 호가 금강거사(金剛居士)요.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문과에 등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송나라에 파견되어 국교재개(國交再開)를 청하였다. 묘청(妙淸)의 난에 원수(元帥) 김부식(金富軾)의 막료(幕僚)로 출전하여 서경함락 때에 공을 세웠다.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특히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고, 주역(周易)에 밝았다. 12세(世) 휘 안숙(安淑)은 시호가 양간(良簡)이고,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13세(世) 휘 척(陟)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에 개성(開城)수복의 공으로 2등 공신에 올랐으며 우왕 때에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14세(世) 휘 승순(承順)은 시호가 충간(忠簡)이다. 응양군 상호군(上護軍)이 되고 뒤에 수차 왜적을 막아 공을 세웠다. 창왕 때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권근(權近)과 함께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에 이르렀다. 15세(世) 휘 곤(坤)은 시호거 소정(昭靖)이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문학(文學)에 기용(起用)되었다. 동지총제로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에게 가담한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2등이 되고,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이 즉위하자 평안도(平安道) 도관찰사(都觀察使)로 나가 악습을 폐지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등 치적을 올렸다. 우참찬(右參贊)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그 후 하향(下鄕)하여 여러 대로 하동(河東) 청암(靑岩)에 정착(定着)하였다. 30세 보구(甫九)가 다시 곤양으로 이주하여 현재 3호가 살고 있다.   문중대표는 32세손 판조이며, 종손은 33세손 사천중학교사인 병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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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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