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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평산(平山) 신씨(申氏) 문희공파(文僖公派) 동천(東泉)   시조 신숭겸(申崇謙)은 전라도 곡성(谷城)사람으로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이었는데 배현경(裵玄慶)ㆍ홍유(洪儒)ㆍ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推戴)하여 고려를 창건하니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태조 10년 대구 공산동수(公山桐藪) 전투에서 견훤(甄萱)군의 포위로 전세가 위급하게 되자 태조(太祖)와 용모가 비슷한 그는 태조를 피신하게 하고 대신 어가(御駕)를 타고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이에 태조가 예장(禮葬)하고 벽상호기태사 개국공(壁上虎騎太師開國公)에 추봉하고, 태조묘(太祖廟)에 배향(配享)하고 숭의전(崇義殿)외 여러 서원(書院)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15세(世) 휘 개(槩)는 자(字)가 자격(子格)이요, 호는 인재(寅齋)요, 시호(諡號)는 문희공(文僖公)이다. 대제학 신집(申諿)의 손자이다. 태조 2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검열(檢閱)을 거쳐 태종(太宗)때에 이조정랑(吏曹正郞)ㆍ예조(禮曹)ㆍ병조(兵曹)ㆍ참의(參議),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 때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북변(北邊)의 야인(野人)을 토벌(討伐)하고,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형조판서(刑曹判書)ㆍ우참찬(右參贊)ㆍ우의정(右議政)을 거쳐 궤장(几杖)을 하사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세종의 조정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술로 <인재문집(寅齋文集)>이 있으며, 문희공파(文僖公派)의 파조이다. 16세(世) 휘 자승(自繩)의 호는 동호(東湖)이다. 진사시(進士試)에 오르고, 예종(睿宗) 기축(己丑)년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고 한강변에 정각(亭閣)을 지어 항상 서가정(徐佳正)과 함께 소요하였다. 17세(世) 휘 숙빈(叔彬)의 호는 한천(寒泉)인데 음직(蔭職)으로 거창현감을 지내고, 연산 무오사화(燕山 戊午士禍)때에 벼슬을 버리고 문경에서 은거하였다. 한천서원(寒泉書院)에서 향사하고 있다. 19세(世) 휘 예(禮)는 호군(護軍)이고, 20세(世) 응효(應孝)는 관부사정(官副司正)이며, 23세(世) 문수(文守)는 행군수(行郡守)이다. 24세(世) 휘 후일(厚鎰)은 공조참의(工曹參議)의 관직을 지냈고, 곤양 동천으로 이거(移居)하여 후손들이 10여 대(代)째 살고 있다.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이거하고 지금 곤양에는 10여 호가 있다.   종손은 36세손 갑부(甲富)이고, 문중대표는 35세손 정래(貞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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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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